[6장] 성 밖에서 발견한 물 위의 진실 – 호수를 미

[6장] 성 밖에서 발견한 물 위의 진실 – 호수를 미끄러지는 깊은 호흡

by 박은아

[6장] 성 밖에서 발견한 물 위의 진실 – 호수를 미끄러지는 깊은 호흡


발트 3국 여행기ㅡ산다는 건, 어느 플루티스트의 깊은 호흡을 찾아서


성은 결국 멀리서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붉은 벽돌이 물에 비쳐 번지는 웅장한 실루엣은, 굳이 그 내부의 낡은 계단을 밟아 올라가지 않아도 중세 리투아니아의 고독한 영광을 고스란히 뿜어내고 있었다. 성 안에 갇히는 대신, 나는 성보다 더 유려하게 흘러가는 갈베 호수의 자유 위에 올랐다.

작은 나무배가 물결을 가를 때마다, 삶의 무게가 실린 발자국 대신 바람의 잔향만 남았다. 나는 여행의 목표였던 '요새'를 등진 채, 바람을 가장 늦게 맞는 그 뱃머리 위에서, 이 트라니까 여정의 진짜 주인공이 되었다. 계획이 깨진 순간, 오히려 시야가 트인 것이다.


함께 탄 배 안,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이미 취기가 올라 목소리가 배의 울림통처럼 요란하게 컸다. 다른 승객들에게는 명백히 소음이었을 그 소리. 처음엔 평화로운 호수 위에서 이 소란이 참을 수 없어 귀를 막고 내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는 오늘 하루 동안 수많은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이방인인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건넨 유일한 인간이었다.

나는 플루티스트의 예민한 귀로 침묵의 결을 자주 읽어내는 사람이지만, 이 호수 위의 침묵은 너무 팽팽하고 무거웠다.


그가 건넨 질문이었든, 웅얼거리는 듯 알아들을 수 없는 리투아니아어 넋두리였든, 혹은 홀로 흥에 겨워 부르는 불규칙한 멜로디였든, 그의 소란스러움은 배 안에 흐르던 낯선 이들의 긴장된 침묵을 산산이 걷어내는 인간적인 틈이 되어주었다. 그의 음성은 마치 돌멩이가 잔잔한 수면에 던져지는 것처럼, 주변의 고요를 깨고 순수한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떠들썩한 그의 말들이 어쩌면 이 비현실적으로 조용한 물 위에 가장 사람다운 흔적, 즉 삶의 파문을 남긴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호수는 그 요란한 소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현자가 제자의 불완전한 외침을 포용하듯, 갈베 호수는 그의 목소리를 부드러운 물결로 희석시키며 스스로의 고요를 지켜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잠시나마 침묵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의 눈빛이 마주쳤을 때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꼬레아?'라고 물어왔다. 취기로 인해 발음은 조금 불분명했지만, 그 물음 속에 담긴 따뜻한 호기심과 친근함은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한국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갈 수 있었던 짧지만 진심 어린 대화는, 차가운 물 위를 떠다니던 나에게 작은 불씨처럼 따뜻하게 남아있다.

그는 짧은 단어와 몸짓으로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이야기했고, 나는 미소와 고개 끄덕임으로 그 삶의 조각들을 정성껏 받아들였다. 통역이 필요 없는, 마음과 마음이 교류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여행의 목적지인 성보다도, 화려한 풍경보다도 훨씬 생생하게 느껴지는 인간의 온기였다. 계획에 없던 그 몇 마디의 대화는,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을 걷어내고, 내가 이 광활한 세상 속에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준 가장 귀한 인연이었다. 그 순간, 나는 트라커이의 아름다운 풍경뿐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을 깊은 호흡으로 들이마셨다.


반면, 며칠 동안 꿈꿔왔던 미식 여행의 정점이라 여겼던 식당은 실망 그 자체였다. 기대가 부풀었던 만큼, 맛도, 분위기도, 불친절했던 서비스도… 어느 것 하나 기억의 저장고에 담고 싶지 않은 씁쓸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여행이란 언제나 이렇다. 성대한 만찬보다도 길가의 돌멩이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더 오래 기억에 남고, 완벽하게 계산된 경치보다도 우산 속에서 맡았던 비의 냄새가 더 생생하다. 우연히 만난 낯선 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리고 비를 피해 황급히 들어간 작은 가게 주인의 친절한 손짓이 트라카이를 정의했다.


결국 여행은, 예상을 뒤엎는 반전 속에 진짜 매혹을 숨기고 있다. 계획했던 '성공적인 방문' 대신 얻게 된 것은 ‘의도치 않은 경험’이었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절대 겪지 못했을 따뜻한 순간들—술에 취한 남자의 격렬한 수다, 보트 위에서 온몸으로 맞은 바람, 호수와 숲에 둘러싸여 동화처럼 펼쳐지는 석양의 황홀경. 그리고 성 입구에서 바보처럼 당황했던 나의 어색한 표정까지도 이제는 기분 좋은 서사의 일부가 되었다.

어쩌면 인생도 그렇다. 우리는 늘 ‘성 안으로 들어가야만’ 삶의 목표를 성취하고 가치를 증명한다고 믿는다. 성취와 결과만이 전부라 여긴다. 하지만 가끔은 그 견고한 성을 멀리서 바라보며,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강 위를 미끄러져 가는 쪽이 훨씬 더 아름답고 깊은 깨달음을 안겨준다.

나는 성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호수라는 광활한 물 위에서 더 멀리, 더 깊이, 나 자신에게로 다녀왔다. 여행은 늘 정해진 목적지 너머, 예상하지 못한 그곳에 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과 예기치 않은 우연이, 참 좋다.


발트 3국 여행기ㅡ산다는 건, 어느 플루티스트의 깊은 호흡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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