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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이 Oct 10. 2023

수상한 엘리베이터 익명채팅방

우리 오피스텔은 1년 내내 섭씨 2ºC를 유지하는 항온 오피스텔이다.

거주민 이목구비 기단의 영향이다.


한치의 표정변화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코입, 누굴 마주쳐도 어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무심한 표정과 몸짓.


바쁜 현대인이라면 당연한 것 아닌가 싶다가도, 본가 아파트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나누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 어느 쪽이 일반적인 모습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우리 오피스텔 사람들은 좀 딱딱하다. 옛날 같으면 '로봇 같다'라고 표현했을 텐데 생각해 보면 요즘엔 로봇도 그렇게 차갑지 않다. 하다 못해 시리만 해도 얼마나 다정한데. 그러니 굳이 로봇이라 칭하자면 음, 절, 별, 로, 끊, 어, 얘, 기, 하, 는, 게, 최, 선, 이, 던, 98년도 로봇이라고 할 수 있다.


한랭건조한 분위기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엘리베이터다. 공기의 흐름마저 멈춘 것 같은 침묵의 공간.

버튼을 누르는 것 외엔 어떤 기능도 탑재되지 않은 뚝딱이 로봇들은 모두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외면한다.


그리고 얼마 전, 그곳에 못 보던 종이가 붙었다.


TV 수상기 보유 현황을 조사하는 종이였다.

옆엔 검은색 모나미 펜도 대롱대롱 달렸다.


주민들은 TV 수상기 보유 현황 조사에 성실히 임했다.

침묵의 공공칠빵처럼,

O, X, O, X, X, O.


룰을 깬 건 익명의 한 주민이었다.


수상기가 뭐죠?


종이 귀퉁이에 흘려 적어 놓은 그 질문에는, 멀리 있는 네이버 지식인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 낫다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 믿음에 곧 다른 주민이 응답했다.


TV요


난 질문도 대답도 참 싱겁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싱거운 대답은 내 의문도 해소해 주었다. 사실 나도 TV 수상기가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역시 음식이든 대답이든 싱거운 건 몸에 좋다.


아날로그 지식인은 그걸로 끝인 줄 알았으나 분리수거를 위해 탄 엘리베이터에서 새로운 댓글을 봤다.


ok. 감사요 :)

네 ^^


갑자기 '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2년 동안 이 건물에 살면서 관리소장님을 제외한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답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모나미펜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채팅용이었다.


일단 'TV요'라는 다정하고 무심한 대답 앞에는 '어쩔'이 붙었다.

교실에서 듣는 '어쩔 TV'는 고자질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므로 들을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엉뚱한 곳에서 만난 그 말은 어쩐지 그냥 웃겼다.

그 유치한 공격에 질세라, 어떤 이는 'TV요'라는 글자에 네모 테두리를 그리고 별표를 쳤다. 수상기는 '어쩔 TV'가 아니라 'TV'라는 친절한 안내였다.



엘리베이터는 총 두 대였으므로, 그 옆 엘리베이터의 조사표에도 낙서가 등장했다.


다들 행복하세요~

넹!


그리고 하루 이틀쯤 지나자, 누가 '넹!' 앞에 '면'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내 앞에선 죄다 웃는 법을 잊은 티베트여우 표정을 해놓고서 이런 앙큼한 댓글을 쓰다니.

정말 웃긴 사람이었다.

그 와중에, '넹면'의 범인은 TV 앞에 '어쩔'을 썼던 사람이 틀림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난 엘리베이터에 탈 때마다 그 종이에 업데이트된 글을 부지런히 읽었다. 고작 3층에 사는 바람에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아쉬워하기까지 하며.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시간을 기대하게 만들다니, 그 아날로그 채팅창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채팅참여자가 급증하면서 난 그걸 읽을 때마다 실눈을 뜨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관리소장님이 일일이 CCTV를 돌려보지 않으신다는 전제 하에, 그곳은 완벽한 익명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한 명이라도 그 채팅방의 특성을 악용한다면 내 기분은 단숨에 엉망이 될 거였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사람들은 아주 작고 하찮은 말들만 주고받았다.


여러분 막 사세요!! 즐겁게


'요즘 a4용지엔 음성파일도 첨부가 되나.'

난 그걸 노홍철 말투로 읽으면서 생각했다.



(여러분 막 thㅏthㅔ요!!)


막사는 건 내가 제일 하고 싶으나 절대 하지 못할 일이기에 난 사방이 벽으로 막힌 엘리베이터에서 그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러나 모두가 나와 같진 않은지, 호기로운 글 뒤로는 현실에 갇힌 사람들의 하소연이 줄을 이었다.


└그러고 싶어요..ㅠ3ㅠ

└막살 수 없는 대학교 4학년..은...울어요..ㅠㅠ → 난 대학교 1학년ㅋ

직장인도요 ㅠㅠ


오, 주변에 대학교가 없는 줄 알았는데 대학생도 살고 있구나.

취준생도 계시네.

대학 신입생 부럽다. 미련 없이 자퇴도 할 수 있겠네. (?)


저층 주민인 나는 글을 적을 시간조차 없었으니, 머릿속으로 부지런히 댓글 하나하나에 또 다른 코멘트를 달았다.


그러다 더 이상 새 글을 쓸 수 없을 만큼 종이가 빽빽해지자 어느 날엔 깨끗한 새 종이가 붙었다.

관리소장님께서 붙이신 게 분명했다.


우리 관리소장님은 건물 관리에 소명의식을 가진 분이다.

엄격하고 깐깐하시지만 완벽에 가까울 만큼 건물 관리에 만전을 기하시는 데다가

비가 오는 날이면 건물 입구에 여분의 우산 몇 개를 준비해 주시는 세심함까지 겸비하셨으니 말이다.

 

소장님은 아마 이 무질서한 익명채팅방 사태를 시시각각 주시하고 계셨겠지.

보다 못해 새 종이로 교체해 두신 게 분명했다.


빳빳한 새 종이엔 한동안 아무도 글을 쓰지 않았다. 전과 달리 빈 종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누가 새로운 스타트를 끊을 거냐 하는, 눈치게임이 시작된 거다.


그리고 얼마 후, 너무 깨끗해 못내 아쉽던 종이에 새로운 글 하나가 등장했다.


그니까 낙서를 작작 했어야지


앗. 드디어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늘 마주치던 점잖은 주민이 등장했다.

그는 엄격하게 낙서를 꾸짖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낙서로 말이다.

아, 이게 현대 예술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나처럼 똑바로 걸어보라'며 아기 꽃게를 나무란 엄마 꽃게 이야기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이솝우화와 현대예술은 통하는 구석이 있다.


한번 침묵이 깨진 조사표는 곧장 다시 시끄러워졌다. 추석을 앞두고선 안전 운전하라는 당부와 추석 인사가 부지런히 오갔다.

발신자 불명의 인사들, 그러니까, 어차피 누가 했는지 아무도 모를 인사를 구태여 건네는 마음들이 살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누군가는 그 비좁은 틈에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 인사하고 지내요~


그 옆엔 곧장 '하이루', '안녕하세요' 하는 댓글이 달렸다.


메말라 갈라진 땅에 새 물이 들이치는 기분이 들었다.

인사하고 지내자는 말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찡하지, 생각하다가 문득 이 건물에서 제일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나라는 걸 알아차렸다.


살다 보니 상황에 알맞은 표정을 짓는 것도 노동이었다. 그러니 그 무표정은, 합당한 대가 없인 그런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겠다는 합리적 사고의 결과였다.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이란 생각으로 난 최선을 다해 표정을 아껴왔다. 엘리베이터가 곧장 우리 층으로 오지 않으면 때로 한숨을 쉬고 짜증을 내어가며. 그러니까, 같은 건물의 주민들은 사실 다 거추장스럽단 생각을 하며.


'그 후로 나는 이웃의 정을 깨닫고 주민을 만날 때마다 용기 내어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로 끝난다면 환상적인 결말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이후로도 딱히 바뀐 건 없다. 사람들의 눈코입은 여전히 미동도 없고, 우린 서로에게 애써 말을 걸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서 완벽해보이던 사람들도 사실 마음은 성글고 가끔은 외롭단 걸 알고 나니, 난 이제 엘리베이터가 곧장 오지 않고 온 주민을 다 태우고 다녀도 이전처럼 짜증이 나진 않는다.


이제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쫄보인 나 대신 누군가는 먼저 인사를 하지 않을까, 새로운 낙서가 있진 않을까, 사실 저 굳어 있는 사람도 속은 말랑하겠지, 어쩜 '넹면'을 쓴 게 저 사람일지도 몰라. 하면서 별 쓸데없는 생각도 한다.


우리 오피스텔은 요즘 섭씨 21ºC를 유지 중이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안농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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