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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다, 세비야!

플라멩코의 본고장, 스페인 광장, 코르도바,

by 달의 노래
내 몸 안의 온전한 정신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너무 뜨거워 땀도 바로 말라 버리는 세비야는 9시 30분쯤 해지기 전까지 태양의 위세가 지랄 맞기 짝이 없다.

세비야의 뜨거움에 압도당해버려 숙소에 짐을 풀어도 나가기가 두렵다.


세비야 대성당 가는 길엔 유혹이 많다.
베네통이 자꾸 손짓하고, 스프링필드가 들어오라 하고, 잉그레스 백화점이 윙크를 날린다.

레바하스(세일)의 유혹을 결국 떨치지 못하고 딸에게 어울릴 가죽 배낭을 하나 산다.

20유로라니.. 너무 싸서 이 감동을 어쩌나.
내친김에 딸내미 셔츠와 이어링까지 산다.
에어컨의 사랑을 뿌리치고 나오면 온 몸이. 삶아질 것 같은 뜨거움, 혼미해지는 정신..

아, 세비야~ 세다.

세비야 대성당 가는 길에 중간중간 만났던 베네통, 풀&베어, 스프링필드, 잉그레스 마귀들 때문에 결국 입장시간 5시를 넘기고 말았다.
입장을 못했다..

콜럼버스가 묻혀 있다는 성당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성당이다.
이사벨 여왕이 무조건 크게 지으라고 명했던 성당이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을 제낀 성당이다.
아, 겉으로만 보기에도 다리가 아픈 성당이다.

유럽 여행은 곧 성당 여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도시에서도 이름 난 성당이 한 두 군데가 아니고, 입장료도 비싸다.
몇 군데 보고 나면 그곳이 그곳 같긴 하다.
우리나라의 절처럼 말이다.
아쉬움은 좀 있지만, 내일 코르도바의 메츠키타에 가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 길에 마귀들만 조심하면 된다. 캄푸, 마시모 두띠 마귀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세비야의 숙소가 어떨지 걱정을 했는데 썩 마음에 든다.
호텔형 아파트를 분명 1 베드룸으로 예약했는데 2 베드룸에 거실도 좋고, 욕실도 쓸데없이 멋지다.
부엌도 완벽하다.
쉰남자는 부엌에 특히 만족한다. 4구 인덕션 레인지 사용법이 서툴러 약간의 짜증을 내지만, 그가 끓여 먹을 라면과 라면과 라면을 생각하면 무지하게 해피한 것이다.

태양에 바싹 구워진 몸뚱이를 숙소에서 식힌 후, 다리를 살살 달래어 '모스'(메트로폴 파라솔)란 곳에 간다.
세비야는 큰 도시이긴 하지만 거의 도보로 도시를 다닐 수 있다.
모스는 재래시장을 재개발하다 유적이 나오는 바람에 더 진행을 못한 채로 있다가 몇 년 전에 다시 계획하여 만든 곳이다.
목조로 파라솔 역할을 하는 거대한 조형물을 만들었는데 4600여 개의 나무 패널들을 연결한 그야말로 작품이다.
고풍스러운 세비야 건물들과 어울리지 않는 흉물이라며 반대한 사람들도 많았다지만 대성당과 함께 세비야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전망대에 올라오니 과연 세비야의 아름다운 전경을 다 볼 수 있다.
특히 우리가 들어가지 못한 대성당과 히랄다 탑을 전체로 조망할 수 있어 좋다.
세비야 대성당은 너무 커서 종탑이나 모스가 아니면 전체를 볼 수가 없다.

모스가 데이트 코스인지 여기저기 쪽쪽 거리는 연인들로 내 촌스러운 눈은 어쩔 줄 모른다.

'야들아, 엥간히 하면 안되겠늬이?
아줌마가 마이 불편타..'

카페에서, 거리에서, 걷다가 문득, 입장 대기줄에서도 그저 눈만 마주치면 쪽쪽거리는 저 쪽쪽이들.. 그래, 좋을 때 표현해라.
그 사랑 오래도록 변치 말길.. 인샬라~

쉰부부는 내친김에 이사벨 다리까지 걸어보자 한다. 동으로 서로 걷다 보면 하루에 걷는 거리는 10킬로미터가 훌쩍 넘는다.
2만 보는 넘게 걷는 셈인데 우째 살은 하나도 안 빠지는 기이한 현상.
이거슨..붓기라 우긴다.

이사벨 다리에는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영감님이 있다.
이 영감님의 레퍼토리는 온리 "대부"라는 것을 다리를 왕복하다 알았다.

"당신도 나중에 노래 딱 한 곡만 배워서 연주해라.
적어도 하루에 10유로는 벌겠다이."


하도 남편이 2유로 거금을 넣으라고 해서 넣긴 했지만 다리 건너편에서 춤추는 총각들에게 돈을 줄 걸 그랬다.





세비야에서 낮에 할 수 있는 것은 실내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별로 없다. 너무 뜨겁기 때문이다. 쉰부부는 둘째 날 낮 동안에 기차 타고 40분이면 가는 근교 도시 코르도바에 다녀오기로 한다.
코르도바는 로마시대의 유적들과 유대인 지구의 메츠키타 성당이 있는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한낮의 코르도바도 덥긴 마찬가지였으나 세비야보다 걸을만하다.
또한 이 곳은 이슬람 사원 안에 가톨릭 성당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혼합된 건축양식으로 이 곳의 종교 전쟁과 정복의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과연 신이 싸우라고 시켰을까.
신의 이름으로 인간끼리 싸우고 죽이고, 뺏고, 뺏기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을 핑계 대고 살육하는 역사의 줄기는 어찌 변함이 없나 모르겠다.

코르도바에 갈 때 쉰남자는 살짝 신났다.
열흘 넘게 스페인에 있자니 슬슬 음식에 질리던 차에 아파트에서 누룽지를 끓여 먹은 후, 코르도바에서 먹을 점심으로 계란 다섯 개를 삶고, 납작 복숭아 네 개와 사과 한 개를 챙겨 왔기 때문이다.
쉰여자도 뜨거운 누룽지와 숭늉으로 속을 풀 수 있어 좋다.





잠시 쉰부부의 역할을 말하자면
여자는 남자의 비서쯤에 해당하고,
남자는 여자의 엄마쯤에 해당한다.

모든 여행 준비와 예약과 체크인, 체크아웃 등은 여자가 다 한다. 남자도 20여 년간 해외영업맨으로 수많은 나라들을 다녔지만 예약이나 스케줄 세팅은 담당부서에서 다 해주다 보니 그 '쿠세'가 아직 남아 있어 여자를 비서쯤으로 부린다.
여자는 남자가 집에서 이것저것 다 하는 편이라 여행 와서도 챙겨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소소한 재미는 없어도 이래저래 편한 건 틀림없다.
뭐, 아무리 부부라도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각자 체질에 맞는 분야를 분담하니 2주 여행 중에도 싸울 일 크게 없는 팀플레이를 잘 하고 있다.
코르도바 '삶은 계란' 얘기를 하다 얘기가 삼천포로 와버렸다.
이왕 빠진 거 삼천포로 좀 더 들어 가보자.
부부는 친구였다 웬수였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손은 꼭 잡고 다녀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서양인들처럼 함부로 애틋하게 아무데서나 쪽쪽 거리는 것은 죽었다 열세 번 깨어나도 못할 일이지만, 나이 들수록 손 잡기는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딱히 할 말이 많은 정서를 공유하는 부부문화는 아니지만 말없이 손만 잡고 걸어도 전해지는 신뢰는 쪽쪽 거리는 얘네들 보다 더 강할 것 같다.
마주 잡은 두 손엔 인내와 믿음과 의리가 사랑의 다른 이름으로 끈끈함을 나누니 말이다. 뭐,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코르도바엔 세르반테스가 묵은 여인숙이 있다.
그곳을 찾아가는 것도 재미나다.

시나고가라 불리는 유대인 거리의 좁은 골목들을 걸으면서 이슬람식 타일 장식들을 잘 보존하고 사용하는 가톨릭인들을 본다.
유대인을 멸시하고 쫓아낸 가톨릭인들의 삶 속엔 유대인의 지혜와 이슬람의 예술과 과학이 짙게 녹아 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영광은 이들이 가진 격이다.

로마시대에 지어진 다리는 여전히 건재하다.
쉰부부도 땡볕이지만 다리를 걷는다.
뭘 하나 만들어도 이리 야무지게 만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 다리 하나 보자고 코르도바에 오는 여행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로마교 초입에 있는 파르테논 유적지에서 한 이탈리아 여자가 이런다.
"뚜데이 뽀르띠 디그리.."
오늘이 40도라는 거다.

"Yeah, it's way too hot. " 이라 응수하니 제대로 대화를 이을 작정인가 보다.

코르도바에서 지내니?
아니, 세비야에서 잠시 들렀어.
오, 우리도 그래.
우린 이제 그라나다로 갈 거야.
오, 우린 그라나다 다녀왔어.
스페인 너무 덥지?
아니, 느거 나라가 더 덥거든.. 은 참는다.

딸이랑 둘이 여행할 때 로마에서 딸내미가 더위 먹어 고생한 것 생각하면 이 더위는 더위도 아니거든.. 도 그냥 말풍선에만 담아둔다.






세비야로 돌아와 드디어 플라멩코 공연을 보러 간다.
숙소에 요청해서 좋은 공연을 추천받았다. 생각보다 저렴하고 공연은 너무나 훌륭하다.
기타와 노래, 손뼉만이 플라멩코의 반주일 뿐인데 어디서 그런 열정의 몸짓이 나올 수 있는지.
넋 놓고 침 흘리며 보기는 처음이다.
허리는 꼿꼿이 세운 채 다리를 그리 세차게 쎄리 돌리다니, 저들의 도가니는 어쩌나..할마이같은 걱정이 절로 나오지만 정녕 멋진 공연이었다. 무이 비엔!

플라멩코 공연의 흥분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대망의 에스파냐 광장으로 간다.
좀 먼 거리라 트램을 탄다.
밤의 세비야 대성당 광장은 거리의 플라멩코, 밸리 댄서와 기타 연주자들 등 각 종 거리 공연들로 생동한다.
에스파냐 광장도 이렇겠지?
이러지 않았다..


산책하는 사람들, 사진 찍으러 온 사람들, 마차 타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로 에스파냐 광장은 조용한대로 멋이 있다.
정말 내가 가 본 광장 중에 스케일은 최고다.
김태희가 광고를 찍은 곳으로 유명하다는데 아니다, 에스파냐 광장은 원래 유명하다.

쏘다니다 보니 둘째 날도 심하게 걸었고 심하게 피곤하다.
쉰부부 더운 세비야에서도 행복했다. 플라멩코의 본고장 세비야에서 본 플라멩코 공연은 속이 뻥 뚫리는 감동으로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 이들에게 시원한 여름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한국의 무더위도 열대야만 없으면 참을만할 텐데..

내일은 일찍 톨레도로 이동한다.

여행은 끝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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