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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랜더들이 사는 곳, 론다!

절벽 위의 도시, 누에보 다리, 헤밍웨이 길

by 달의 노래

론다에 매료된 계기는 몇 해전 EBS의 세계테마기행의 스페인 편에서였다. 가수 이상은이 협곡에서 절벽 위의 도시를 스케치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절벽 아래에서 보이는 누에보 다리는 비장함마저 들었다.

'론다는 절벽 다리뿐이라 반나절이면 다 볼 수 있다' 라는 말들을 믿지 않았다.

헤밍웨이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마을이라 극찬한 곳, 그가 스페인 내전 중에 썼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의 산실인 이 곳을 어찌 반나절이면 다 볼 수 있겠는가.
휙휙 찍고 지나가는 관광이라면 반나절이 아니라 두 시간 이내에도 볼 수야 있겠지만, 나는 절벽 아래의 길이 궁금하고, 두 마을의 골목들이 궁금하다.

'쉰부부'의 스페인 여행은 보름의 짧은 일정이지만 작은 도시에도 최소 2박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정을 짰다.

진짜 절벽 양 끝에 마을이 있고, 누에보 다리가 멋지게 두 마을을 잇고 있다.


누에보 다리 밑의 협곡을 호기롭게 내려 간다.
절벽 아래에서 보이는 다리는 위용이 더 대단하다.
그 위용은 올라올 때 절감한다.
땀은 비 오듯 하고, 숨은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힘들어 죽을 만하면 물 한 모금으로 셀프 심폐소생을 실시한다.
나는 이래서 등산이 싫다.

쌩쇼를 하고 올라오니 이상하게 또 평지를 걸을 힘이 난다.
그러나 이미 옷은 다 젖어 버려 이대로 걸을 수는 없다.
숙소에서 땀을 씻고 긴 팔, 긴 바지로 갈아입고 나오니 팔랑팔랑 날아갈 것 같다.



명소 지도를 받아들면 뭐하나..

노안으로 작은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쉰남자도 쉰여자도 잔 글자에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리다 지도를 넣어 버린다.

그냥 다녀보자..


걷고 싶은대로 걸으니 명소도 만나고, 론다 주민들이 사는 골목도 만난다.
이름 모를 성문을 만나고, 성곽을 걷고, 끝없이 펼쳐진 황금 밀밭도 본다.
밀밭의 구불구불한 길을 보고 있자니 고흐의 그림 속에 서 있는 착각이 든다.
현실감각이 떨어질 정도로 그림 같긴 하다.



론다의 밤은 무수한 별들이 또 하나의 볼거리다.

누에보 다리 야경을 보러 나온 수 많은 사람들..
나와 남편은 파라도르 테라스에서 일몰을 감상한다. 인위적인 빛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보다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려운 밤별들 보기를 택한다.


론다의 여름밤은 춥다.
한국은 최고의 더위임에도 누진세 때문에 에어컨을 제대로 못켠다는데 괜히 집에 있는 아이들과 엄마께 미안한 마음이다.
우리는 추워서 긴 팔 입고 잔다..



아침 일찍 남자는 절벽 아래에 있는 밀밭길을 걸으러 나갔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기분을 잠시라도 느끼고 싶었겠지.
마침 절벽 아랫마을에 알베르게도 있으니.

나는 내일 세비야로 떠날 준비로 버스 터미널 답사를 간다.
천천히 걸으며 버스 터미널의 위치와 시간을 파악하고 돌아오는 길에 중국인 슈퍼가 있다. 무턱대고 들어간다.
왜 이런 걸 물었는지 모르겠다.
"Do you have a Korean ramen?"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여자가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진짜 컵 신라면을 준다.

별 기대없이 그냥 물어봤을 뿐인데 마침 딱 하나뿐이다.
아, 남편에게 큰 선물이다.

남편과 점심쯤에 만나 전망 좋은 곳에서 까페 콘 레체(카페라테)를 한 잔 마시고 또 무작정 걷는다.
어제 걸었던 마을의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비밀의 정원'이란 간판에 멈춰서 보니 미셸 오바마가 방문한 곳이란다.
입장료 5유로의 가치를 하겠지 싶어 들어가니 제대로 그 가치를 한다.

론다를 통치하던 이슬람 왕조가 세운 비밀 요새로 지하계단을 통해 절벽 아래 협곡까지 내려갈 수 있다.
그라나다의 나자리 왕조가 이사벨 여왕에 의해 알람브라를 빼앗겼을 때 이 지하요새를 지었다고 한다.

어제 내려갔던 협곡의 반대쪽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계단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계단 밟고 다시 올라온다는 것이다. (또 쌔가 빠지게 올라와야 한다는 것이다.)





꽃보다 할배 덕에 론다엔 한국인 여행객들이 참 많다.
여기 저기서 예쁜 원피스 입고 셀카를 찍는 아가씨들을 보니, 웃기고 재미나다.

셀카 찍으며 실시간으로 sns에 올리고 즉각적인 피드백 받는 재미도 여행 재미로 따지자면 쏠쏠할 것이다.
지금 나의 복장은 완전 국적불명이다.
마카오에서 산 긴 팔, 바르셀로나에서 산 긴 바지,
말라가에서 산 여름 운동화..
대충 보면 중국 아줌마 패션이고, 자세히 보면 꼭 접시 돌리기 하는 써커스 단원 같다.
에라, 모르겠다.
자, 나에게 접시를 주세요~



가장 뜨거운 시간인 오후 다섯시에서 일곱시 사이는 파라도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기로 했다.
말라가 파라도르의 수영장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좋았기에 그런 시간을 기대했는데, 론다의 산바람에 너무 추워서 한 시간도 못하고 나온다.

쉰남자는 론다가 너무 좋단다. 그래서인지 10분에 한번씩 말한다.
"론~~다아~"
론다, 내 마음에도 쏙 드는 마을이다.

쉰부부는 잘 논~~다아~.






헤밍웨이는 론다를 가장 로맨틱한 마을이라고 했단다.

그가 머물며 즐겨 산책한 길, 일명 <헤밍웨이 길>은 파라도르에 연결된 공원에 있다.

그가 걸었던 그 길을 걸으며 잠시 밀밭을 구경하다 휙 부는 바람에 내 모자가 날아갔다.

어, 어~~ 하는 사이 내 모자는 저기에 외로이 앉았다.

내려갈 수 있다며 찾아 오겠다는 남자를 뜯어 말린다.

"사소하다. 목숨 걸지 마라..또 사면 된다!"

심히 아쉬워하는 남자를 내가 왜 달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창.넓어 좋았던 유니클로 모자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이다.




마지막 날 저녁은 소꼬리찜과 새우 아히조, 더운 야채 샐러드와 '까바'라 부르는 화이트와인 한 병으로 론~다의 추억을 만든다.

론다는 소꼬리찜으로 유명하다. 이 곳은 투우가 시작된 곳이고, 그만큼 많은 소들이 죽어나간 곳이다. 소들의 명복을 빌며 꼬리를 맛있게 먹는다. 오랜만에 먹는 보양식이다. 12.9유로..참 괜찮은 가격이다.

론다의 밤은 절벽을 날아 다니는 세찬 바람에 긴 옷을 입지 않을 수가 없다.
비닐봉지들이 바람에 마구 날아 다닌다.
아쉽지만 숙소로 들어가서 론다의 밤별들에게 굿나잇 인사를 해야겠다.


내일은 오전 10시 버스로 세비야로 이동한다.






론다에서 세비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한 산길이라 경치는 좋은데 버스 멀미가 스멀스멀 느껴진다.
어디를 가나 말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너무 시끄러워 질릴 지경이다.
운전기사 바로 옆에 앉아서 징그럽게도 떠들어대는 세뇨르여, 제발 돈 씨부리!

라고 소리 치고 싶은 마음을 꿀떡 삼키며 헤드셋의 볼륨을 키운다.

창 밖 풍경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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