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도시 탈린에서 4일 살기
스톡홀름에서 사흘을 지낸 후 저가항공을 타고 헬싱키 공항에 내렸다.
사흘동안 라커에 보관해 둔 캐리어를 찾고, 동생파 S와 J를 만나 '실야라인' 이란 큰 배를 타고 이웃나라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으로 왔다.
극적으로 배를 탄 이야기는 생략해야겠다.
배 놓칠 뻔한 사연은 늘 다르지만 결과는 '천신만고 끝에 탔다' 로 매 같으니 이런 에피소드는 그만 우려먹어야겠다.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EBS <세계테마기행> 에서 4~5년 전쯤 탈린을 처음 접했는데 너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 때 여행자는 영화 <친구>의 범생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서태화'라는 배우였는데 (별걸 다 기억해낸다) 중세의 삶을 사는 올드타운의 모습을 보여주며 귀 얇은 나를 혹하게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탈린의 올드타운은 중세시대 건물 그대로의 곳인 것은 맞다.
그러나 어디 사람들이야 아직도 그렇게 살겠는가.
중세시대 복장을 하고 영업을 한다.
우리가 지내기로 한 올드타운 한 복판의 집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밤 10쯤 도착하니 호스트는 집 열쇠를 이상한데 숨겨놓고, 그 와중에 비는 거세게 퍼붓고..탈린에서의 시작은 이래저래 난감한 일이 발생했지만, 그래도 나는 드디어 탈린에 온 것이 감격스럽기만 하다.
Finally, Tallinn!
간밤엔 비가 세차게 내렸는데 아침 하늘은 파랗다. 그러나 기온은 초겨울 같아서 옷들을 여러겹 겹쳐입고 머플러로 목을 칭칭 감고 나갔다.
시청사 광장엔 마켓이 열리고 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남부 에스토니아에서 온 주민들인데 이번 주말이 1년에 단 한 차례 자기들이 시청사 광장에서 자릿세 없이 장을 열 수 있는 날이라고 했다.
모자를 직접 뜨게질 해 온 아주머니가 이것 저것 써보며 모자쟁이인 나를 유혹한다.
아주머니가 써보이는 모자들은 희한하게 다 예뻤다. 아마도 머리통(?) 모양이 예뻐서 그런가보다.
우선 추워서 내 것만 샀는데 다음 날 또 가서 엄마와 두 언니들 것까지 샀다.
탈린에 언제 또 올 수 있을 것이며,
1년에 단 한번 남부 에스토니아인들이 여는 장날에 물건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내 인생에 또 있을 수 있겠는가.
Now or never 라는 모토로 now and here 에서 눈에 보이는 예쁜 것들은 다 사리라.
Old Hansa 는 탈린의 대표적인 중세식당이다.
비쌀 줄 알았는데 가격도 저렴하고, 무엇보다 중세시대처럼 촛불만 켜놓은 컴컴한 실내에서 날렵하나 친절하게 움직이는 종업원들의 프로정신이 아주 돋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중세의 전통 음식을 먹었는데, 꼭 우리나라 돼지족발 같은, 잡내도 나지 않고 정말 맛있다. 동생파 둘은 주문한 honey beer가 맛있다고 극찬을 한다.
호기심에 조금 마셔보니 진짜 맛있는 맥주였다. 돼지족발과 함께 두 모금, 세 모금 마시다 보니 아이구야, 머리가 띵 하다.
세시에 올드타운 free walking tour에 참여했다.
탈린의 대학생들이 자기의 나라를 제대로 소개하고자 자원봉사 차원에서 한다고 하는데 투어 끝나고 도네이션은 환영이란다.
영어가 네이티브처럼 유창했다.
목소리도 화통하고 설명도 거침없는 걸 보면 프리 워킹투어 진행을 꽤 오래 했나보다.
워킹투어 동안 비가 오다가 그치기를 수십차례.. 우산을 썼다가 접었다가, 모자를 썼다가 벗었다가, 선글라스를 꼈다가 뺐다가.. 변덕스러운 날씨가 게으른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비가 퍼부을 땐 중간중간 나무 밑에서, 처마 밑에서 설명을 듣고, 해가 나오면 볕 좋은데서 설명을 들으며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특히 올드타운의 중요한 역사적 장소와 배경과 현재의 에스토니아 실정까지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아, 투어 시작 전에 각자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소개하는 타임이 있다.
우리팀은 미국, 영국, 이태리, 벨라루스,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의 네 미녀로 투어 끝까지 도망치는 사람없이 함께 다녔다.
투어는 두 시간 동안 진행되고 인포메이션 센터 앞에서 모여 시청사 광장 가운데서 해산한다.
나와 친구들은 각자 10유로씩 도네이션 한 후 헬렌과 헤어졌다.
내일 하루 먼저 탈린에서 스톡홀름으로 나이트 크루즈를 떠나는 동생파와 밤에 광장을 또 나와 보니 비는 또 오고, 또 춥고..그런데 야경은 왜 또 예쁘고 난리야..
간단히 자기 취향대로 음료를 시켰다.
이 음료 그대로 개성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모히또 주문한 J의 개성은 맥주가 잘 설명해 주는데 말이다. (얜 오더 잘 못했다고 본다..)
탈린에서의 세번째 아침은 대놓고 비가 주룩주룩이다.
어제 헬렌의 동선대로 한번 더 복습해서 걸으며 설명 듣고 따라 다니느라 제대로 찍지 못했던 사진도 찍고, 주변도 천천히 걸어 다니려고 나왔는데 탈린의 날씨가 좀처럼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그래도 코리아의 여사님들은 굴하지 않고 톰페아 언덕길도 다시 오르고 short leg 문을 지나 long legger들이 살았던 귀족동네를 한번 더 훑는다.
우리야 산동네가 달동네로 못사는 동네지만, 서양의 권세있는 집안들은 다 언덕에 살면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살았다.
현재도 부유한 집들과 대통령 관저, 총리 관저 , 대사관 등이 이 동네에 있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수도원 자리에 와인 카페가 있는데 유령 수도사 동상들이 왠지 섬뜩하다. 마치 해리포터의 '디멘터' 같다.
나는 여기 이 시점부터 컨디션의 이상을 느끼고 만다.
동생들에게 민폐일까봐 말없이 같이 다니긴 했는데 그냥 혼자 숙소에 돌아와 쉬는 편이 나을 것 같아 탈린의 셋째 날은 이것으로 마무리 했다. 숙소 내 방 침대에서 외롭게 혼자 아프고 서글퍼하며 말이다.
침대에 누워서도 천장이 빙글빙글 돈다. 젠장..
탈린의 넷째 날 아침 하늘이 기분 좋아 보인다.
어제 저녁 약 먹고 걱정하며 잤는데 일어나니 어제보다 덜 어지럽다.
그동안 비 와서 제대로 즐기지 못한 우리 동네의(?) 면면들을 다시 확인하고 1422년부터 이 자리에서 600백년 가까이 약국을 하고 있는 "Apteek" 이라는 약국에 간다.
가지고 간 애드빌이 다 떨어져 애드빌과 같은 이부프로펜 계열의 진통제를 600년 된 약국에서 사게 될 줄이야.
누가 약쟁이 아니랄까봐..
탈린은 헬싱키에 비해 물가가 굉장히 저렴하다.
헬싱키에서 먹을 납작복숭아를 8개나 사도 0.5유로 남짓이다.
마트에서 시장을 보고, 예정보다 이른 배편으로 헬싱키로 돌아간다.
탈린에서의 나흘이 그렇게 흐른다.
편안했던 숙소를 떠나자니 아쉽다.
뭐야, 탈린이 아니라 숙소가 아쉽다니..
탈린에선 촛불을 세번쯤 켰나 보다.
신께 드릴 말이 나름 좀 있었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