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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파티마에서의 뜨거웠던 하루

by 달의 노래


<파티마에 들어오다>

젊음과 자유가 과하게 흘러 넘치던 라구스를 떠나

Rede Express 버스로 리스본까지 4시간, 리스본에서 파티마까지 1시간 30분을 달렸다.
인구 8천명의 작은 도시 파티마에 도착하니 내리쬐는 햇빛만이 있을 뿐 바람 한 줄 불지 않아 당혹스러웠다.
구글이 42도라고 알려준다.
난생 처음 접해보는 40도 이상의 기온이다.
이 온도에 도보로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아갈 수는 없다.
택시를 타고 마리아 할머니 집을 찾아 가는데 택시에 에어컨이 없다.
마리아의 집에도 에어컨은 당연히 없었고, 침대 위의 곱게 얹어 놓은 담요가 그간 파티마의 날씨를 보여준다.
여름에도 그만큼 선선하다는 것인데 우리 부부도 그렇지만 에어컨 없는 이 곳 주민들은 이 황당한 기온에 어쩌나.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실내는 그나마 바깥보다 시원하다.
파티마 바실리카에 가기 위해 무리한 동선에도 불구하고 파티마에 왔는데 이를 어쩐다..


<파티마의 기적>
1917년 5월 13일, 포르투갈에서도 가장 빈촌이었던 파티마에서 양치는 일을 하던 루시아(10)와 프란치스쿠(9), 히야친타(7) 앞에 밝게 빛나는 여인의 형상이 나타났다. 여인은 자신이 묵주의 성모이며 앞으로 다섯 번 더, 매월 13일에 나타나 평화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예고했다. 이후 10월 13일까지 성모를 목격한 사람은 7만여명에 이르렀으며 마지막 성모 발현일인 10월 13일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태양이 빙글빙글 도는 등의 현상을 목격하기도 했다.



< Air B&B 호스트, Maria >


Welcome, Miriae!

Have you enjoyed the journey to here?

You are lucky, there will be a candle mass tonight. I recommend you to join it.

처음 만났지만 미리 메시지를 서너차례 주고 받았기에 아주 반갑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 받았다.
오늘밤은 촛불미사가 있으니 꼭 가보라고 권유하는 마리아..
혼자 사는 마리아는 일흔이 넘으신 분인데 고고한 기품이 참 은은하게도 베어 있는 분이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는 마리아의 영어는 아주 세련되었다.
포르투갈에선 영어가 잘 통하는 편이 아니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이들이나 영어에 능숙하지, 대부분의 로컬상인들과 주민들은 영어를 잘 하는 편이 아니다. 라구스의 에어비앤비 호스트 마리아 할머니는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희한하게도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여기는 슈퍼마켓이고, 슈퍼마켓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면 해변이 나오고..등등의 집 주변 설명 말이다.

영어 못해도 호스트와 게스트 사이의 의사소통엔 아무 문제가 없다.

서로 열린 마음과 어지간한 눈치가 중요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라구스에서도 마리아, 파티마에서도 마리아의 집에서 지낸다.

내 이름이 미리애라 그런가..

송by문 부부는 호텔 보다 에어비앤비를 선호하는 편이다.
도시 특유의 주택에서 지내며 공간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처럼 호스트의 아파트 방 한 칸을 빌리기는 처음이다.
다행히 욕실이 방에 있어서 크게 불편한 일은 없다.
그녀의 기품답게 집 인테리어도 고급스럽다.
라운드형 소파 배치는 둘러 앉아 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리아는 수익을 위해 에어비앤비를 하는 것 같지 않다.
겨우 에어비앤비에 지불한 돈이 47,000원이다.

이 가격에 그녀의 집에서 하루 머물기가 미안할 정도다. 게다가 자신의 키친과 냉장고에 있는 음식도 다 이용해도 좋다고 한다.
어쩌면 그녀는 파티마에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위한 지역 봉사자일지도 모르겠다.


< What led us here?>
마리아의 집에서 파티마 대성당까지는 도보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원피스를 입고, 손수건에 물을 적시고, 마리아가 준 물병을 챙겨 들고 4시쯤 대성당을 찾아 나서는데 괜히 비장해진다.

마리아가 알려 준대로 집에서 오른쪽으로 막다른 곳까지 쭉 가서 다시 오른쪽으로 꺽은 다음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니 대성당이 보인다.
사실 길을 몰라도 대성당은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있긴 하다.
우리는 대성당의 뒷모습 부터 봤다.

마리아의 집에서 걸어가면 대성당 후문 주차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걷는 길이 너무 더워 계속 땀을 쏟고, 입에선 뜨거운 숨이 연신 얼굴로 올라왔다.
남편이 다시 손수건에 생수를 부어 적신 후 목에 둘러 주었다.

눈 앞이 노래졌는데 물 적신 수건 덕에 다시 정신줄을 잡을 수 있었다.

남편은 내게 최적화된 여행 메이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포르투갈 여행을 결정한 후 파티마는 'must go' 리스트에 있었다.
꼭 한번 가 보고싶은 열망은 카톨릭 신자 아닌 자의 욕심이라해도 좋다.
기적이 행한 곳에서 내 가족, 내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한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나 마찬가지다.
좀 솔직해지자면,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면 나도 덩달아 행복한 삶이니 그저 나 좀 잘 봐 주십사 하는 기도와 다름없다. 그래도 내 마음 속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것만으로도 벌써 그들에게 은혜가, 내게도 충만함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파티마 성모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로사리오 성모 대성당 (Basillica of Our Lady of Fatima Rosary)이다. 교황청에서 기적이 일어난 성지로 인정한 곳이라 바티칸에 있는 베드로 바실리카 다음으로 파티마 바실리카라 명해진 곳이라 들었다.
오후 5시.. 40도를 웃도는 이상기온의 이상한 날임에도 긴 초에 불을 붙이고 기도를 올리는 제단은 활활 타오르는 촛불의 열기와 신심으로 가득찬 이들의 열기로 섭씨 80도는 넘는 것 같다.
초는 30cm부터 1미터가 넘는 것까지 다양하다.
남편과 나는 30cm 초 6개를 사서 세개씩 불을 붙이고 기도를 올렸다. 이미 꽂혀진 긴 초들이 뿜는 화염에 초를 꽂기조차 어려웠지만 우리에게도 간절함이 있어서인지 뜨거움을 참고 초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았다.


< 신비한 체험 >

삼위일체 성당( Basillica of the Holy Trinity)은 로사리오 성모 대성당 (Basillica of Our Lady of Fatima Rosary) 의 광장 서쪽에 있다. 현대식 성당으로 세계 각국에서 모여드는 이들을 위하여 9천여명이 미사를 드릴 수 있다고 한다. 세계 3대 성지인 만큼 공모를 통해 건축가를 선정했다고 하는데 인도 출신 건축가에 의해 탄생된 작품이다.

마리아의 집에서 걷는 동안 체력 소진도 많이 되고 대성당에서 광장을 가로질러 올 때 그늘도 없어서 내 몸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남편은 공원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고 했지만, 삼위일체 성당에 들어가서 앉아 있고 싶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순간의 서늘함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건물에 에어컨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나 시원하던지..

2004년에 건축을 시작해 2007년 완공된 현대식 성당이지만 종탑이 있는 높은 성당과 달리 지중에 들어 있는 성당이라 느낌이 묘했다.

낮은 곳에서 더 많은 이들을 반기는 성당이라..

삼위일체 성당 안에 들어가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아이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중에 한 남자아이는 휠체어에 앉아서 몸을 비틀며 소리를 질러 댔지만 성당 안 누구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다들, 각자, 자기 내면에 있는 신과 조우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나도 남편과 멀찍이 떨어져 앉아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삼위일체 성당 내부에는 여러개의 'Chapel'(예배당)이 있다. 각 채플엔 고해성사실도 있었는데 영어 고해성사 시간도 따로 있었다.

내가 들어간 채플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고요한 채플 안에서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리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별 특별한 기도를 드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우리 엄마 이름 석자를 부르는데 눈물이 솟구쳤다. 언니 둘, 오빠 둘의 이름도 정말 오랫만에 불러 보았다. 내겐 그저 큰 언니, 작은 언니, 큰 오빠, 작은 오빠였던 이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는 것은 낯설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그리고 남편과 딸, 아들의 이름과 시어머니의 이름을 나즈막히 불렀다.그 순간 떠오르는 친구들의 이름도 천천히 불렀다.

그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그 뿐이었다.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것, 누군가의 존재가 이름으로 치환되어 생각 안에서 입 밖으로 나온다는 것, 그러므로 진정한 실체가 되어 다시 내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

그 와중에 감정의 울림이 있어 눈물이 흘렀나 보다.

그 때 이상하게도 몸에 어떤 에너지가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뭐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쪼그라진 풍선에 공기가 들어와 다시 팽창해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는데 묘하게 기운이 다시 났다.

참 신기했다.

삼위일체 성당의 작은 채플에서 경험한 신비한 체험이었다.


<월드 부페>

마리아 할머니의 집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마리아 할머니는 저녁을 먹으러 나가셨나보다.

그리고 보니 우리도 하루 종일 별로 먹은 것이 없다.

나는 매일 하나씩 먹는 에그타르트와 세상 미지근한 아이스티, 남편은 사그레스 맥주 한 병과 성의없는 샌드위치가 다였다.

우리도 무얼 좀 먹으러 가자..

마리아 집 옆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완전 로컬주민들로 가득했다.

우리가 들어가면 이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우리로 인해 깨질 것 같은 분위기여서 처량하게 쳐다만 보다 좀 더 만만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기로 했다.

그 다음 식당은 폐장 분위기였고, 그 다음 식당은 폐장했고, 그 다음다음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다 9시30분에 시작하는 촛불미사에 늦을 것 같았다.

일단 대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 때 아주 환한 전등 불빛을 보았다.

남편은 자기가 먼저 뛰어가서 보겠다며 안 뛰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직감적으로 큰 식당임을 알았고 남편의 꽁무니를 쫓았다.

전 세계 도처에서 오는 순례자들을 위한 월드부페였다. 포르투갈 여행 중 가장 싼 값에 가장 다양한, 거기다 그리운 김밥과 불고기까지 있는, 감사한 저녁식사를 했다.

이 기운으로 영광스러운 촛불미사에 끝까지 있을 수 있었다.


<촛불 미사>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성모 발현 경당으로 갔을 때는 이미 그 곳은 수 많은 촛불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낮에 왔을 땐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데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왔을까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대성당 주차장엔 단체 버스들이 유난히 많았다. 더워도 너무 더우니 낮엔 숙소에 있다 밤 미사에 참석을 한 것이겠지.

미사 중 찬송을 하는 남성 두 명의 목소리는 천상의 소리처럼 은은하고 부드러웠다.

이 날은 베트남에서 온 신부님이 나오셨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몰랐지만 '아베 마리아'는 확실하게 알아 들었다.

포르투갈 신부님은 '애베 매리애'라 계속 하셨는데 경건하게 듣고 있어도 슬쩍 웃음이 나왔다.

남편도 애베 매리애를 계속 듣다 귓속말로 "당신 이름이 왜 자꾸 나오는거지?"라 말해서 참지 못하고 웃었다. 에고..불경스럽게 말이다.

미사 형식도 순서도 모르지만 미사를 끝까지 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남편도 여느 때 같으면 이만 가자고 재촉을 했겠지만 끝까지 인내심 있게 옆에 있어 주었다.

그 뿐인가.. 촛불을 들고 광장을 도는 마지막 순서에는 어쩌다 우리 부부가 그 긴 행렬의 최선두에 있었다.

낮에 삼위일체 성당에서 보았던 휠체어에 앉아 있던 아이와 아빠도 우리 근처에 있었다.

아이는 낮에 보았던 것만큼 소리를 지르지 않았고, 아이의 아빠는 한 손으로 휠체어를 밀고 다른 한 손엔 촛불을 들고 있었다.

아이와 아빠에게 은총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남편과 나는 이 시각 이 곳에 있다는 것에 감개가 무량했다. 돌아가면 둘이 꼭 같이 성당 다니자고 속삭이면서.

촛불 미사가 끝나고 마리아 할머니 집으로 돌아오니 마리아는 촛불미사가 어땠냐며 물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It was a holy-beautiful -peaceful mass."
성스럽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미사였다는 말 외엔.

<Good bye, Maria>
우리는 아침 일찍 신트라로 떠나기로 했다. 마리아 할머니가 깰까봐 조용히 챙기기는 했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이 들면 아침잠이 없는 법.
마리아는 나이트 가운을 걸치고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체크아웃 시간이 낮 12시이지만 오후까지 있어도 된다며 왜 이리 일찍 떠나느냐고 물으셨다.
내 대답은 "너~~무 더워요. It is too hot to move in the afternoon."
'낮에 체크아웃 하면 버스역까지 데려다 줄 수 있는데..'라며 아쉬워하는 마리아 할머니께 감사의 말을 한 후 문을 열었다.
남편은 나서다 말고 마리아를 돌아보며 "Wish you a good health!"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God bless you!"

마리아의 덕담에 뭉클했다.

아름다운 마리아 할머니에게도 신의 가호가 늘 함께 하기를..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1917년 신문기사


하루 머물렀던 마리아의 숙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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