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작은 남부 도시 라구스
1. 라구스의 첫 인상
포르투에서 5일째 되는 날 남부 도시 라구스로 날아왔다. 아, 라구스.. 용암같은 에너지가 넘쳐나는 도시다.
2012년부터 해마다 여름이면 유럽 여행을 해왔지만 작은 도시 라구스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가히 상상 이상이다. 압도적인 풍광, 환상적인 비치의 향연, 휴양지임에도 착한 물가가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불러모으나 보다.
레게 머리를 하고 10년은 샴푸를 하지 않은 것 같은 히피들은 기타를 띵까띵까 치며 제 젊은 날의 최고 가치가 자유임을 깡 마른 몸으로 보여준다.
얘들아, 서캐나 머릿니는 없냐? 너희들이 지나갈 때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아줌마를 이해하거라.
꼰대라서 그렇단다.
꼰대 아줌마는 그 고목 나뭇가지 같은 레게 머리를 보기만 해도 가렵구나..
자유를 갈망하는 히피 아이들보다 약간 나이가 더 있는, 약간 더 깔끔한 젊은이들은 그들대로 비치에서 뜨거운 태양과 파도소리에 취해 서로들 뒤엉켜 있다. 담배인지 마리화나인지..꽁초를 나눠피는 무리들도 많다.
젊은 여성이고 늙은 여성이고 다들 젖가슴은 "None of your business!"라는 듯 태양을 향해 풀어져 있다.
송사마는 처음엔 화들짝 놀라며 무슨 나쁜 짓하다 들킨 사춘기 머스마처럼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안절부절 못하더니 이틀째부터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 들인다
자꾸 보니 괜찮단다.
뭐가아?
누가아?
2. 자유로운 곳인데 뭔가 불편하다?
라구스는 포르투에서 아주 멀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부산과 강원도 같다고 할까.
포르투에서 버스를 타고 오려면 족히 7시간은 걸리고 직행버스가 없어 중간에 리스본에서 갈아 타야한다.
늙다리 쉰부부 'Song by Moon'이 동선을 무리하게 짠 이유는 어차피 항공편이 포르투 in, 리스본 out이기 때문이다. 저가항공을 이용하여 포르투에서 라구스(정확하게 Faro)로 이동해서 4일동안 여러 해변을 다니며 푹 쉰 후 리스본으로 들어가서 나머지 여행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 가려는 것이다.
라구스의 인구는 3만1천명 정도라는데 지금 이 곳의 여행 인구는 로컬민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밤이면 골목골목은 여행자들로 터져 나간다.
그런데.. 이렇게 휴양지 냄새 물씬 풍기는 아름답고 자유로운 비치의 도시에서 나는 왠지모를 답답한 느낌이 드는 건 뭔가.
라구스는 돈 있고, 돈 없는 여행자들의 지상낙원 같은데 나는 이상하게 심리적으로 불편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 득실거리는 서양인들 속에서 남편과 나만 동양인이라는 것..
소외감을 느꼈다.
지나가면 누구든지 우리를 쳐다 봤다.
이 동네에서 동양인을 본다는 것이 그들에게도 뭔가 불편했을까?
3. 어쩌다 라구스?
내가 느끼는 라구스의 매력은 자연이 빚어낸 절묘한 절벽 비치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라는 거다.
원어민 동료 Todd 선생이 아니었으면 라구스는 포르투갈 여행에서 생각조차 못했을 곳이다.
"Miriae teacher~ you should go to Faro, especially Lagos, the beaches there are incredibly awesome. Blabla.."
토드는 들뜬 영국식 액센트로 설레발을 떨며 자세한 설명과 함께 구글맵을 열어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사진을 보니 정말 환상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그 환상적인 사진 속에 나와 남편이 있다.
진짜 몹시 정녕 환상적이긴 한데 지구촌 어디든지 씩씩하게 다니는 한국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왠지 고립감이 들면서 공황처럼 답답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오늘 두 명 봤다.
신기하고 반가웠는데 눈인사를 해도 쌩까는..역시 파이팅 있는 한국 친구들이었다.
그 파이팅 자세로 서양애들에게 헤헤 웃고 그러지 말기다. 말 안 통하고 잘 못 알아들어도 웃으면 다 되겠지 하며 실실 웃기 금지인 거시야~
무튼 한국인이든 중국인이든 동양 사람들아! 저 키 크고 빵빵하고 쓸데없이 영화배우 같은 서양 사람들에게 주눅 들지 말자..들!
김해시 장유면에 사는 쉰부부가 책임지고 여기 라구스 물 흐려 놓을테니.
4. 라구스의 이중적 날씨에 대하여
첫 날 마리아 아주머니 집에 체크인을 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절벽 트래킹이었다. 절벽을 걸으며 내일 우리가 갈 비치를 찜하기 위해서였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경치를 보며 남편과 나는 멀어도 오길 잘했다며 서로 토닥거렸다.
둘이 이럴 땐 쿵짝도 잘 맞고 잘 논다.
라구스는 남부 지역답게 굉장히 뜨겁다.
낮엔 태양 광선총 맞은 것처럼 살갗이 타고 말라 비틀어지는데 밤에는 또 너무 춥다.
웃기는 건 여기 가게들은 여름 옷, 겨울 옷을 같이 판다는 것이다.
처음엔 참 이상했는데 저녁에 바람이 쌩쌩 불어 야외에서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내려올 때 깨달았다.
라구스에서는 낮엔 손바닥 만한 헝겊 쪼가리, 밤엔 스웨터를 걸쳐야 하구나..
날씨도 밀당을 하나보다.
5. 라구스 비치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마리아 아주머니가 구비해둔 개인 파라솔과 비치타올을 가지고 찜해 둔 비치로 갔다. 집에서 가까운 비치가 있지만, 더 험준한 골짜기를 지나면 더 조용하고 예쁜 비치가 있다.
내 전용 보자기를 깔고 백사장에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다.
서양애들처럼 책이나 읽을까?
폼나게 책을 꺼냈다.
그냥 꺼내기만 했다..
기분이 몰랑몰랑해서 책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뿐더러 노안이라 글자도 절대 안 들어오는 슬픈 현실은 우짜노.
바다에나 들어가 볼까?
들어간 순간 비명을 지르며 나왔다.
물이 겨울바다처럼 차가웠다.
그래..그럼 수영은 포기다.
가만히 하늘 쳐다보며 누워 있는거야.
이것도 폼 나, 폼 나..
그런데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둘이 포개져서 쪽쪽 대고 있고, 오른쪽으로 누우면 내 머리 대각선 쪽에서 열렬하게 쪽쪽 대고 있고.. 지나가는 우먼들은 토플리스에.. 레게머리 추즙은 오빠야들은 기타를 띵까띵까 치며 노래는 드릅게도 못불러..
아, 이 자유분방함에 우리 늙다리 동양인 둘은 어쩔 줄 몰라 눈만 깜빡 거리다 일찍 철수하고 돌아왔다.
왠지 허기가 져 저녁은 근사한 곳에서 소개기 먹으며 뭔지 모를 허전함을 채웠다. 그 허전함이 하루 종일 동양인을 보지 못한 허전함이었다는 건 침대에서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둘이 같이 찾아 낸 것이다.
6. 라구스 동굴 탐험
전날 미리 예약해둔 동굴 탐험을 하는 날이다.
남편과 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예약시간에 맞춰 나갔는데 다들 겉옷을 입고 와있네.
결론부터 말하면 추워서 죽을 뻔 했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보트에 놀라 죽을 뻔했고, 하필 우리 부부가 배 가장 앞자리에 앉아 겁나 죽을 뻔 했다는 거다.
그러다 협곡 동굴이 있는 비치로 접어 들었을 땐 감탄하느라 얼 빠졌다.
두 시간의 탐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선 남편도 나도 녹초가 되어 멍하니 널부러져 있었다.
그래도 내일 아침 일찍 떠나니 오늘이 마지막 날이나 마찬가지인데 또 비치에는 나가야지 싶어 집에서 가장 가까운 비치로 갔다.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태양이 너무 강렬해서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아..라구스 날씨 참 앗싸리 하네.. 파이팅 있네..'
송사마와 내가 잘 쓰는 표현을 빌자면 그렇다.
보자기를 깔고 누워서 한 시간쯤 잔 것 같다.
동굴탐험 후유증인가.
그러다 너무 더워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했다.
포르투갈에도 갑자기 이상 고온현상이 나타났다.
라구스도 예외가 아니다.
어제보다 바닷물이 따뜻하다.
역시 바다에선 개헤엄 아니던가.
유유히 차가운 바닷물을 헤집고 다니며 더위를 식히고 다시 누우니 기분도 기운도 살아나는 것 같았다.
옆에서 위에서 밑에서 부둥켜 안고 쪽쪽 거리고, 토플리스로 다녀도, 오늘 이 순간 여기서 나는..나만의 소중한 '모멘토'를 가지는 것이다.
라구스에서의 마지막 밤이라 동네를 한바퀴 돌며 동양인 쳐다보는 시선까지 즐기다 집으로 들어왔다.
그나저나 포르투갈도 이상기온이라 내일 파티마는 41도, 리스본은 45도까지 올라 간다는데 걱정이다.
내일, 드디어 가톨릭 성지 파티마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