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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戀歌

이름만큼 아름다운 도시, Lisboa

by 달의 노래

< 리스본이 이상해 >


"It will be very hot from tomorrow, it goes up to over 45 degree in Lisboa. It's crazy, after all, that is our fault."

라구스에서의 마지막 날 저녁을 먹었던 레스토란테에 종업원이 모레쯤 리스본의 기온은 45도 이상 올라갈 것이라고 미리 알려준다. 크레이지한 이상기온이라며 이게 다 사람의 잘못이라 말한다. 백 번 옳은 말이다.

리스본의 여름 평균 기온은 24~25도라고 하는데 남편과 내가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는 43도가 넘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아담한 집을 예약해 놨었는데 파티마 마리아 할머니 집에서 나는 리스본 집 예약을 취소했다. 예약해 둔 집엔 에어컨이 없기 때문이다.

기온의 앞자리가 4를 넘어가는 경험은 50년 사는 동안 처음이다.

우리 부부는 호텔을 좋아하지 않지만, 에어컨이 있는 호텔로 계획을 급변경했다. 기온이 43도라잖아..


리스본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 시내에 있는 숙소를 찾아가는 것쯤이야 이젠 어렵지 않다..만 몇 발자국 걸을 때마다 숨이 턱 막힌다.

남편의 배낭에 내 짐까지 다 넣어버려 나는 내 몸과 구글맵을 켠 아이폰만 챙기면 되는데 그것도 거추장스럽다. 나도 남편 배낭으로 들어가고 싶다.

남편은 또 무슨 죄란 말인가..


'포르투'에서 지낼 때는 너무 추워 덧입을 옷을 사야 했고, '라구스'의 저녁 식사 땐 바람막이 재킷을 걸쳐야 했고, 동굴 투어를 할 땐 바람이 너무 차가워 입이 돌아갈 지경이었건만, '파티마'와 '신트라'를 거쳐 리스본으로 이어지는 여정에는 45도에 육박하는 사막 기후로 눈 앞이 하얘지다가 깜깜 해지는 온열병에 시달려야 했다.

좋은 시간이 마냥 이어지지 않는 것이 여행이다.

인생과 기가 막히게 닮았다.


<Timeout Market>

파티마, 신트라에서부터 온열병에 시달린 까닭에 리스본에 도착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감에 빠졌다. 더위를 모르는 송사마는 혼자 리스본 구경을 나간단다.

물 한 병과 20유로와 트램 노선표를 들고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니 슬 걱정이 앞선다.

'저 님, 혼자 돌아다니다 저혈당 증세 오면 어쩌지?'

송사마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 나는 호텔방에서 에어컨을 18도로 하고 널브러져 있다.

로시오(혹은 호시오) 호텔은 위치도 좋고, 직원들도 무척 친절하다.

가격 대비 룸 컨디션이나 조식 역시 매우 훌륭하다.

(혹시 리스본에 머물 님들은 꼭 참고 하기를..)

한 3시간쯤 지났을까.. 얼굴이 핼쑥해진 송사마가 돌아왔다.

덜컥 겁이 났다.

"여보, 당신도 어서 여기 침대에 널브러져 있어. 얼굴이 헬갛다.('핼쑥하다'의 경상도 사투리)"

"아니, 괜찮은데.. 배가 많이 고프네. 당신은 일어날 수 있겠어?"

그러고 보니 나도 배가 많이 고프다. 밖에 나가면 또 눈 앞이 노래질텐데..

호텔이라 뭘 만들어 먹을 수도 없다.

그때 생각난 것이 바로 Timeout Market이다.


어느 날 우리는 <원나잇 푸드 트립-포르투갈 편>을 보았다.

이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로 가서 누가누가 많이 먹나를 겨루는 컨셒의 예능 방송이다.

남편과 나는 먹는 것보다 여행지에 관심이 많아 즐겨보는 편인데, 리스본에서 이 프로그램의 덕을 볼 줄이야..

무튼 리스본 첫날 저녁을 뭐 먹지.. 생각하던 차에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이 타임아웃 마켓에서 이것저것 먹는 모습이 생각났다.

"여보, 우리도 타임아웃 마켓 가보자. 여기서 지하철 타고 세 정거장만 가면 있대~"


우리가 타임아웃 마켓에서 선택한 것은 원나잇 푸드트립에서 맛있다고 극찬한 태국 음식이었다.

포르투갈 편에서 포르투갈 음식이 아니고 태국음식이 맛있다고 보여 주다니..

아무렴 어떤가.

얼큰한 국물도 있고, 아삭한 숙주볶음도 있는 똠양꿍과 팟타이, 그리고 화이트 와인..

남편은 자리를 잡고 나는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뭔가 바뀐 역할 같지만, 어차피 길 찾기와 예약, 주문 담당은 문여사고 그 외 모든 잡다한 일들은 송사마가 하기로 계약서에.. 는 없다.


이 공간에도 당연히 에어컨은 없다.

음식을 만드는 셰프들의 얼굴에선 굵은 땀방울들이 연신 떨어진다.

'저러다 음식에 떨어지면 간이 너무 세지는거 아닌가?'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20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내가 주문할 차례가 온다.

더워 죽겠는데 완전한 문장의 영어는 되려 촌스럽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투 똠양꿍, 투 팟타이, 원 화이트 와인!
오케이, 베이비!

이누무 시키.. 누구더러 베이비래..


주문하는 줄은 엄청 길었는데 음식은 빨리 나온다.

맛은 한국에서 먹던 태국 음식보다 훨씬 맛있다.

덜 달고 덜 짜다.

송사마는 우그적 우그적 잘도 먹는다.

잘 먹는 송사마를 보니 괜히 기분이 좋다.

마누라에서 엄마가 된 이 느낌.. 왜 이러냐.


죽을 듯이 더워도 허기는 피할 수 없는 것.

먹는 일은 때론 꼭 풀어야 하는 숙제와도 같다.

무튼 먹어야 산다.


빨리 찍어..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는 저 눈초리..
송사마 혼자 28번 트램 타고 다닌 흔적..


< 우아한 리스보아 >

리스본에 관한 여행 후기를 읽다 보면 리스본은 복잡하기만 하고 볼 것도 없는데 며칠씩 머물 필요가 없다는 평을 꽤 보게 된다.

솔직히 이런 후기들 때문에 리스본에서 하루만 머물까 했다.

그러나 리스본 같은 도시를 어찌 하루만 지내보고 평가를 할까.

리스본에서 나흘을 지내보니 이 도시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시간만 허락하면 더 있고 싶다.

리스본이 복잡하기만 한 도시라고 한 님들의 말도 맞다.

복잡한 곳만을 골라 다닌 여행자에겐 리스본은 그냥 복잡하기만 한 도시일터이다.


그러나 님들이여,

알파마 지구의 꼬불꼬불한 언덕을 걸어 다녀 봤는지?

캄캄한 골목길을 걷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애끊는 파두 소리를 들어 봤는지?

성 죠르제 캐슬에 올라 아름다운 리스본의 지붕들을 유심히 보았는지?

테주강이 도도히 흐르는 코메르시오 광장을 걸어봤는지?

우아함의 극치인 아우구스타 길을 걸어 봤는지?

산타 헬레나의 밤거리를 걷다 춤바람 난 젊은이들의 춤을 본 적이 있는지?

자작한 바다를 걸어 벨렘탑에 가봤는지?

리스본 건축물들의 벽을 세심한 눈으로 살펴봤는지?

나는 파리의 건축물들이 그 스케일만큼이나 우아하다고 느꼈지만, 그에 못지않게 리스본의 건축물들도 자존심 뚝뚝 묻어나는 우아함을 갖고 있어서 이 도시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러니 섣불리 리스본을 판단하지 마시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도시임에 틀림없다.

어린 시절 끝말잇기 놀이를 할 때면 어김없이 '보리-리스본-본드'.. 의 그 전통 깊은 리스본을 얕보지 말지니.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타르트 가게.. 트램 타고 벨렘역에 내려 길 따라 300미터쯤 가면 만난다.


<리스본 28번 트램>

송사마와 문여사가 포르투갈 여행을 한 지도 2주가 다 되어간다.

집에는 고2 아들이 신나게 에어컨 빵빵 틀어가며 지내고 있다.

대학생 따님은 사촌과 함께 유럽 여행 중이시다.

다행히 아들이 오롯이 혼자 집에 있는 날이 4일 정도라 죄책감도 딱 4일만큼 든다.


리스본 3일 차가 되니 저녁부터 선선한 바람이 분다.

이것이 본래의 리스본 날씨인 것이다.

기분 좋게 밤 산책을 나간다.

트램을 타기도 애매하고 걷기도 애매한 알파마 지구..

여기선 무조건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

부산 산복도로 보다 더 구불구불한 언덕길 골목들..

그 좁은 골목을 트램과 버스, 택시, 자가용이 사이좋게 잘 나누어 쓰고 있다.

신경질적인 빵빵~~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저 트램이 지나갈 때까지 트램 뒤의 자가용이나 버스는 기다리고만 있다.

맘 놓고 쌩하게 달릴만한 직선 주행 길이 없기도 하거니와.

대중교통이 이러하니 사람들도 느긋한가 보다.


28번 트램을 습관적으로 탔다.

이 동네 어린 남자아이들은 트램 밖에 매달려 저 내리고 싶은 곳 아무 데나 뛰어내린다. 어리바리 배 나온 중년 남자는 소매치기에 지갑을 잃어버려 가뜩이나 흔들리는 트램 속에서 더 뒤뚱뒤뚱 거리며 지갑을 찾는다.

내 눈에 소매치기 놈이 보였지만 워낙 빠르게 일을 치고 내린 통에 어찌 도와줄 방법이 없다.

같이 뒤에 타고 있던 미국 여자는 그에게 돈을 빌려주려고 지갑을 꺼내려한다.

그녀의 남자친구쯤으로 보이는 이가 잽싸게 그녀의 손을 잡아 끈다.

"베이비, 그냥 좀 있어 보라니까.. 우리가 해결해 줄 수는 없다구.."


얼떨결에 지갑 털린 중년 남자와 미국인 커플과 우리 부부가 함께 내렸지만 배불뚝이 아저씨는 도움은 필요 없다며 트램이 올라왔던 길 따라 거꾸로 내려간다.

아이고.. 어째 이 아저씨, 보기에도 많이 허술하다.

누가 우리 송사마를 볼 때 이런 감정이 들까 몰라 씩 한 번 더 남편을 체크한다.

눈에 힘주고! 고개 딱 들고! 으이!



<리스본 연가>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 밤이다.

오늘은 누가 뭐래도 파두 공연을 봐야 한다.

유서 깊은 카페에서의 파두 공연은 너무 비싸니 알파마 동네 골목들을 걸어 다니다 노랫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으면 자연스레 들어가기로 했다.

바람이 부니 얼마나 좋은지..

구글 웨더를 보니 23도란다.

사흘 전 여기 올 땐 43도라더니..

무려 20도가 내려갔다. 드라마틱하게 내려간 기온만큼이나 기분은 업!


바람도 시원하게 불겠다, 기분도 좋겠다.. 굳이 트램을 타지 않고 걸어 다니기로 한다.

어차피 파두 공연을 하는 카페나 레스토란테를 찾으려면 운동화 신고 걸어 다니는 것이 마땅하다.

송사마는 어제 그냥 지나친, 자유로움이 넘치던 레스토란테를 찾고 싶어 하지만, 그리고 문여사는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사실.. 못 찾는다. 그 꼬불꼬불한 골목을 어떻게 기억하고 찾아간단 말인가.

한 번 지나간 골목은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가 목적하는 곳의 이름을 모르니 구글맵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그냥 정처 없이 걷다 쉬다 한다.

그러다 어느 곳에선가 기분 좋은 음악 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린다.

스윙 리듬의 음악 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가보니 상큼한 젊은이들이 멋진 댄스를 하고 있다.


오.. 저런 댄스 감각은 타고나는 것이겠지?

아니야, 어려서부터 저런 문화에 젖어 있어서 그런 거야. 부모 세대의 문화를 보고 자란 것이니 저리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거야.

그럴지도. 근데 쟤네들 댄스 동아리일지도 몰라.


송과 문은 각자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

신이 나서 손뼉을 치는데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듕국 아줌마들이 젊은이들 언저리에서 춤을 춘다.

아..듕국인들도 광장 댄스가 보편적이니 저리 거리낌 없이 춤을 춘다.

나는 마음만 저들처럼 돌리고 돌리고..

이 시간, 이 곳, 이 공기가 너무 좋아 송사마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한껏 친한 척을 한다.

흡사 고양이처럼.. 부비부비..


"여보.. 왜 이렇게 엉겨 붙는 거야~ 부담스럽구로.."


부담스럽다는 송사마에게 눈 한 번 흘기고는 일어선다.

배도 고프다. 파두 공연을 하는 레스토란테를 찾으러 나왔다 댄스에 홀린 시간이 꽤 크다.

한 번 간 골목은 못 찾는다고 했던가?

용케도 찾긴 했는데 이 카페는 파두 공연이 없다.

파두 공연만 없는 게 아니라 우리 앉을자리도 없다.

더 걸어보자..

어디선가 잔뜩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성이 노래를 한다.

어! 저기야~


야무지게 생긴 키 작은 중년 여성이 노래를 하며 흥을 돋우고 있다.

그러다 잽싸게 누군가를 소개하고 박수를 유도하더니 그녀는 카운터로 들어간다.

송사마와 나는 애매하게 밖에 서 있다.

들어오라고 해야 들어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거니와, 이미 파두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중이어서 좁은 가게에 들어가기도 민망하다.

그런데 내 뒤의 중국인 커플들이 거침없이 들어간다.

순간 파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예민해지며 이들을 본다.


'아.. 우리는 좀 있다 들어가자..'


마침 가수의 한 곡이 끝나고 우리도 들어가긴 했는데 자리가 너무 협소해 우리가 앉으려면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 일어나 주어야 했다.

미안해도 어쩔 수 없다.

그들도 이리 앉았을 테니 말이다.


우리가 앉기를 마치자(진짜 어렵사리) 키 작은 아줌마는 모두에게 어디서 왔는지 묻는다.

신기하게도 모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다.

영국, 홍콩, 벨기에, 한국,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미국..

파두 노래는 애절한 곡도 있지만 청중의 호응을 유도하는 신나는 노래도 있다.

키 작은 아줌마는 우리에게 같이 외쳐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우리는 뭐라 하는지도 모르면서 후렴구에 뭐라고 외쳐라 하면 그대로 외친다.

지금도 궁금하다. 우리가 외친 말이 무엇일까?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밤, 작은 파두 식당, 좁은 좌석에 앉아 우리는 그저 시원스럽게 외치고 환호했다.

리스본에서의 완벽한 밤이었다.

다만, 올리브 오일에 푹 삶은 문어는 너무 맛이 없었다..


"여보~ 당신 덕분에 포르투갈 여행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어. 고마워."


와인 한 병을 다 마시고, 와인에 취해 파두에 취해 걸어 내려오는 사람 많은 길에서 송사마는 나에게 고맙고 행복한 여행이었다며 느닷없이 키스를 했다.

결혼 연식 22년 차 부부에게도 이런 모멘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란 것인가..

리스본 여행의 감상은 오글거리지만 '리스본 연가'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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