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를 만나다
4월에 포르투갈 여행을 계획했을 땐 다소 충동적이었다. 새 학교 이동 후 낯선 환경에 몹시 힘들었던 나를 위해 뭐라도 다른 재미있는 일을 기다리게 하고 싶었다.
항공편 예약 후 차근히 준비하려던 계획은 그냥 계획일 뿐이었다. 업무로 퇴근시간 전까지 단 30분의 여유도 없었다.
시간은 이리저리 나를 질질 끌고 다녔지만, 고맙게도 흘러가 주었다. 약속은 잘 지키는 놈이었다.
그리고 포르투..
바랜 파스텔 빛 건물들에 묘한 기품이 있다. 어떤 건물은 이제 그만 제발 좀 죽여 달라는 듯, 결국 살려 달라는 듯 보이지만 말이다.
이른 아침 도착해서 숙소가 있는 곳까지 순조롭게 왔다. 에어비앤비 숙소는 3시 이후에 체크인을 하는데 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내니 친절하게 12시 조금 넘어 집을 내주었다.
내가 지불한 돈에 비해 무척 과분한 공간이다.
동네 빵집에서 포르투갈의 첫 타르트를 먹었다. 아, 이 맛이었구나.
별다를 것도 없는 맛이지만 오리지널이라는 선입견에 괜히 더 깊은 맛이 있는 것 같다.
인식이 주관적인 맛까지 간섭을 하나보다. 다른 가게 타르트를 더 먹어보면 선입견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암스텔담을 거쳐 포르투까지 오는 여정이 길어 걸으면서 이코노미 증후군을 없앴다.
그냥 쎄리 돌렸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하니 좀 있어 보이나 모르겠다.
골목에서 쨍쨍의 흔적을 만났다.
당당하게 걸려 있는 쨍쨍을 가리키며 내 친구라고 하니 화가 아저씨가 더 깜짝 놀라며 나를 반겼다.
그는 나와 사진을 찍고 싶다며 부산을 떨었다.
넘어가는 해가 선물같은 빛을 도우루 강에 비추는 시간.. 포르투 와인과 새우 아히조와 대구 요리를 먹으며 황금빛의 도우루를 조망하는 이 시간이 정녕 내 시간이 맞나 싶다.
자고 일어나니 비 오는 포르투다.
작은 도시 포르투를 하루에 14킬로미터 이상 걸어 다니다 만나는 골목과 집들, 개똥과 고양이들.. 벽화와 돌 세탁기..
해질녘에 언덕으로 모이는 사람들..
조안 롤링의 상상력을 자극한 렐루서점의 계단, 그 앞에 무심히 있는 야외 카페, 있는 집 마님들의 사교모임을 이끌었다는 머제스틱 카페, 아찔한 루이스 다리를 앗싸리하게 지나는 메트로와 그 옆을 아슬하게 지나는 사람들..
포르투의 주인은 단연 저 시끄러운 갈매기들이다.
언뜻 들으면 아기가 패악 부리며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개들이 싸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프다고 우는 염소 소리 같기도 하고, 지나가는 암말 희롱하는 숫말 소리같기도 하고, 저것들은 다 갈매기 소리.. 참 버라이어티한 음색의 시키들이다.
연일 폭염으로 시달리는 조국의 동포들에겐 너무 미안한 말이지만, 포르투의 기온은 20도 내외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고, 덮고 자는 이불은 두꺼운 다운 이불이다.
목 끝까지 올리고 잔다.
한 낮의 햇볕은 무척 따갑고 강렬하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서늘하고, 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면 추워서 스카프를 칭칭 감는다.
어제는 아침에 비까지 와서 70퍼센트 할인 하는 베네통에 들어가 색깔 무늬의 긴 바지와 초록 재킷을 샀는데 여기다 모자까지 쓰니 여자 태진아 같다.
남편은 보기 괜찮다고 하면서 손도 안잡으려 하고, 지 혼자 앞서 걷는다.
아..여자 태진아 쪽 팔리고 똑땅해..
낮시간엔 집에 돌아와 두어시간 쉬다 다시 나간다. 목적은 딱히 없다. 다만 맛있는 문어 요리를 하는 집이 어디 있을까만이 우리의 정확한 목적일 뿐.
오늘도 문어요리 맛집 찾으러 나가선 그 목적 잊어 버린채 이 골목 저 골목에 반하다 녹초가 되어 돌아 오겠지, 뭐.
송사마는 샐러드와 호밀빵, 나는 뜨거운 누룽지와 마른 멸치로 아침식사를 한 후 포르투 시내로 나가는 시간은 대략 9시30분이다. 집이 시내에서 2.4킬로 떨어진 주택가라 30분 정도 걸어야 올드타운이 나온다. '송 by 문'은 골목 골목 정처없이 쏘다니다 우연히 명소를 발견하는 재미를 찾으러 쎄리 돌린다.
어젠 주말장이 열려 소소한 소비의 기쁨을 누렸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란테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세시쯤 들어와 휴식을 한 후 다시 저녁에 나가는 패턴에 합의했는데 어제 송사마는 숙소에 들어가 두어 시간 쉬는 것이 아깝다며 계속 밖에 있기를 고집했다. 나는 쉬어야 또 돌아 다닐 수 있다고 맞섰다.
내가 송사마한테 늘 진다는 건 아는 사람만 안다.
송영감탱이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는 대신 렐루 서점 앞 공원 잔디밭에 보자기를 깔아 주며 누우란다. 그렇게 40분쯤 누워 있었다.
부산말로 하자면 등더리는 찹고 얼굴은 뜨거벘다.
그래도 집에 돌아가면 못해볼 경험이라 생각하니 나름 쿨한 것 같았고, 공기가 깨끗해서 그런지 피곤이 약간 가시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하필 내 나무그늘 밑으로 한국인 남자, 여자가 들어와 앉는다. 모자로 얼굴 가린 채 휴식 중인 내 귀에 귀찮게시리 알아듣는 언어가 들어 오다니.. 헌데 들리는 두 남녀 대화가 요상하다.
먼저 남자가 전화 통화를 한다.
"어, 자기, 더워서 어떡해. 너무 일 많이 하지 말고, 쉬엄쉬엄 해. 어, 나는 잘 있어..어쩌구 저쩌구.."
남자가 통화를 끝내자마자 옆에 있던 여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전화를 받지 말던가 통화감이 안 좋아서 더 통화 못한다고 하던가! 내가 옆에 있는데 그 전화 꼭 받아야 해?"
헐.. 이 상황은 뭐냐. 이거슨 불륜? 바람? 그것도 이역만리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 하필 내가 먼저 누운 내 나무그늘 에서?
막장 드라마 듣느라 잠이 달아났다.
일어나니 으슬으슬 춥고, 목이 아팠지만 송사마의 바램대로 시청 광장으로 내려가 2층 버스인 500번 을 타고 포르투 시내를 훑었다.
버스 안에서 내 컨디션은 점점 엉망이 되었다. 송사마는 그제야 지 잘못을 깨닫고 500번 종점에서 메트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자 했다. 택시는 왜 안 태워주는 거시냐..c..
집에 오자마자 송사마가 끓여준 안성탕면을 맛없게 먹고, 보란 듯이 목에 수건 감고 애드빌 pm 한 알 먹은 후 바로 쓰러져 잤다. 일어나니 아침 7시15분.. 숙면을 하긴 했는데 간밤에 누가 들어와서 몽둥이로 때렸나보다. 온 몸 구석구석 결리지 않은데가 없다.
뜨겁게 샤워를 하니 좀 풀리는 것 같다.
하, 또 누룽지에 멸치 쪼가리 먹고 쎄리 돌리러 나가야지.
집에 있으면 뭐 하겠노..
포르투 상벤투 역에서 기차로 한시간쯤 달리면 '아베이루' 라는 근교가 있다. '송by문'은 근교를 다녀 오기로 했다.
"To Aveiro, two persons, round ticket, please."
"4 euros."
뭐? 두 명 왕복티켓이 4유로면 편도 기차요금이 겨우 1유로?
한번 더 확인을 해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4유로.. 기차가 메트로 보다 더 싸다니.
아베이루에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우~ 가는 방향으로 따라 가니 센트럴이 나온다. 사람들이 우~ 줄 서 있는 곳에 줄을 서니 '몰리세이루' 라는 운하용 보트를 타는 곳이다.
1인당 10유로다.
1유로짜리 기차 타고 와서 10유로짜리 관광 보트를 타다니..
역시 관광지 물가는 다르다.
아베이루에서의 우리는 전형적인 투어리스트일 뿐이었다.
포르투갈은 대서양 귀퉁이에 있는 나라라 그런지 생선 요리가 많다.
아베이루 역시 생선 요리가 맛있단다.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식당이 있어 간판을 보니 'Ferro' 라는 레스토란테이다.
아, 이 집 이름을 책에서 봤다.
그런데 책에선 분명 일요일은 문을 열지 않는다고 했는데 일요일에 특히 활짝 문을 여는 곳이구나.
마침 2인 테이블이 하나 있기에 잽싸게 앉았다.
옆 테이블의 아자씨들이 먹고 있는 음식이 참 맛있어 보여 메뉴판을 열고 콕 집어 달라니까 뭔가를 찍어 주는데 알고보니 영어로 피쉬 스튜, 즉 생선 찌개였다.
생긴 것도 딱 우리나라 매운탕 같다.
아주 짤 것으로 예상 했지만 간이 딱 좋았다.
참, 음식이 나오는 동안 옆에 앉은 아자씨가 자기는 르완다의 앙골라에서 왔단다.
그러면서 리조트 같은 자기 집, 마흐라나 뭐라나 아주 비싼 자기 차, 심지어 16살적 사진까지 보여주며 온갖 허세를 다 떨었다.
송사마는 장단 맞추는 거 힘들다며 사이사이 불평을 하면서도 르완다 아자씨의 비위를 곧잘 맞추었다.
와인 한 잔까지 얻어 마시며 헤헤 거렸다.
음식이 나온 후엔 스튜 냄비에 코를 박으며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너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왜 안쓰럽고 짠한지..부부란 참 알다가도 모를 관계이다.
아베이루 다녀온 최고의 성과는 송사마가 생선 스튜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는 것으로 해야겠다.
포르투에서의 4박5일 마지막 밤..
송과 나는 메트로 타고 루이스 다리를 건너기로 했다. 포르투 둘째 날에 걸어서 건너 봤지만 메트로 느낌은 다르지 않을까.
그리고 그 곳에서의 휘황한 야경을 한번 더 보고 싶었다. 다시 봐도 얼마나 멋질까 잔뜩 기대했으나 일요일 밤 10시라 그런지 기대만큼 찬란한 야경은 없었다. 대성당도 불을 껐다.
역시나 소박하고 검소한 포르투..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
송사마도 많이 아쉬운지 '안녕, 포르투!' 를 포르투갈 말로 외치고 싶다며 "사요나라, 포르토!" 란다.
하..부끄러움은 늘 내 몫이로다.
내일은 새벽 일찍 일어나 악명 높은 라이언 에어를 타고 라구스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