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진에 관한 사소한 대화
『사물들의 물질적 내밀성은 그 다양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아주 특징적인 몽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꿈꾸는 인간은 사물들의 한가운데로, 사물들의 물질 자체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 가스통 바슐라르』
어린 날 눈이 몹시 나빠져 모든 사물이 희미하게 보일 때 시력 측정을 하면서 쓰였던 숟가락이 혹시 아닐까. 왼쪽 오른쪽 눈을 번갈아 가리면서 보일락말락 한 숫자를 읽어내던 때, 숟가락은 한쪽 세상을 곧잘 가둬 버리곤 했었지. 글쎄 그것이 아니면, 아마도 그 옛날 둥근 어머니의 두레 밥상에 놓여 있던 숟가락일지도 모를 일이야. 너무도 익숙하게 매일 밥을 떠 먹여주던 그 숟가락, 때로는 형의 숟가락이기도 했고 누나의 숟가락이기도 했던, 돌고 도는 밥상 위의 숟가락에 지금은 시간의 녹이 고여 있네. 밥 대신 시간을 떠서 입 안 가득가득 넣어주고 있네. 생각만 해도 배가 불러와.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있다가 어느 순간 스멀스멀 기어 나와 그때를 회상하게 해 주는 친근한 사물들은 요상한 마력을 가졌어.
그냥 그것인 채, 태어난 제 용도에 맞게 쓰이다가 그만 기력이 떨어질 때면 스스로 기억 창고로 들어가 지친 몸을 눕히는 물건들. 때론 어느 고물장수에게 팔려가 다른 몸으로 둔갑했을지도 모를 일이기도 한데, 낡았지만 제 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야. 그래서 잊혀진다거나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언제든 따뜻한 추억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지. 사물의 힘은 그런 것이야. 우리에게 그렁저렁한 시간이 흘러 다시 눈 앞에 보일 때이거나 손으로 만져질 때, 훌훌 시간을 털어버리고 내 안으로 쏙 들어와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야. 그래 그때 그랬었어. 그냥 그것들은 어렵지 않게 말을 걸어 오지. 지금도 어느 시골 농가 시렁 위의 소쿠리에서 녹을 먹고 있을 놋그릇이며 숟가락이며 젓가락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