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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Sep 06. 2023

여름에 대한 감상평.

인생의 가을

피부로 여름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통쾌하다 못해 후련하다.


나에게 여름은 곤욕의 계절이다.

체질 상 더위를 잘 견디지 못함도 있고,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와 나이 터울이 많은 동생 덕분에 어려서부터 에어컨에 길들여진 탓도 있는 것 같다. 덕분인 건가?


불쾌지수가 높은 것은 여름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며칠만 바빠도 싱크대와 쓰레기통에 끓어대는 초파리떼의 공격과 밤새 계속되는 열대야는 숙면을 방해하다 못해 온몸이 끈적이는 불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싫다.

잠시 차에 오르내릴 때, 화장실을 갈 때, 집 앞 편의점에 가거나 반려견과 산책 준비를 하는 짧은 행동에도 땀이 주룩-! 흐를 때면 부아가 치밀 만큼 불쾌하다.


여느 계절과 다름없는 행동인데 여름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지치고, 더 고되게 느껴지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매해 여름이 오는 것이 못마땅했다.

올해 특히 유난스러운 더위는 심신을 더 지치게 만들었고 8월의 마지막 주말, 9월의 시작을 목 빠질 만큼 기다렸다.


드디어 아기다리고기다린 가을 초입.

새벽공기는 제법 차가워 잠결에 이불을 꽁꽁 싸매게 되고 사무실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길에도 땀이 흐르거나, 볼일을 보는 동안 더워서 짜증이 치솟지 않는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길에도 주룩-! 등 뒤로, 이마 아래로 땀이 흘러 짜증 날 일 없다.


오후가 깊어질수록 그늘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이 곧 가을이 온다는 예고편같아 반갑다. 온도의 변화만 조금 있었을 뿐인데 “이제야 기운을 좀 차리네”라고 할 정도로 내 컨디션은 요즘 최상이다.






반려견 나무와는 계절과 상관없이 평균 주 2~3회 아침산책을 한다.

야외배변과 더불어 맞벌이 부부인 보호자와 함께 사는 반려견의 활동량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한데, 주 1회 정도 점심시간을 틈타 산책하는 날엔(직장이 무척 가까운 편) 아침 산책을 생략하기도 한다. 활동량이 평일보다 많은 주말 직후 월요일도 휴식기이다.


퇴근 직후 저녁밥을 챙겨 먹기 전에 산책을 먼저 한다. 늦은 밤의 찬 공기가 오기 전의 저녁시간이 산책하기에 가장 적절한 온도감이기 때문이다.


여름은 이 단순하고 명쾌한 산책 루틴마저 완전히 바꿀 수밖에 없도록 횡포를 놓는다.

더위가 지구로 상륙하기 전의 이른 아침이 반려견과 사람 모두 산책하기에 그나마 적절하다. 늦은 여름밤처럼 습하지 않고 오후처럼 뜨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우리 가족은 아침산책을 빠짐없이 해야 한다. 퇴근 후 산책의 순서가 그저 '여름'이라는 이유 하나로 강제 시간 조정을 당하기 때문이며 심지어 더위가 절정인 날은 밤 9시 이후 겨우 산책이 가능해져 달궈진 아스팔트와 아직 뜨거운 지면의 열기는 생각보다 위협적이다.


강렬한 여름이 시들시들해졌고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기온이 도래했다.

어제는 좋아하는 얇고 긴 셔츠를 챙겨 입고 아침 산책에 나섰다. 나와 비슷하게 반려견 나무에게도 더위는 쥐약인지라 요 며칠 선선해진 날씨 덕분인지 아침이면 산책을 나가자고 졸라댄다. 피곤하지만 웃음이 나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행복한 일상이다.


한풀 꺾이는 더위와 함께 조금은 느슨해지는 여름의 텐션 (정확히는 짜증의 텐션)이 여러모로 일상에 이롭다.






곧 마흔을 앞둔 우리 부부는 근래에 '건강한 삶'에 본능적으로 이끌리는지 소식(小食)을 하고 영양제를 챙겨 먹고 운동량도 조금씩 늘리고 있다.


어제는 시원한 바람에 설레어 오래간만에 자전거를 탔다. 여름 내내 에어컨 바람 쐬며 호화롭게 길러둔 기초체력과 근력량 덕분에 올초 봄의 라이딩 기록보다 긴 시간, 좋은 속력을 기록해 기분이 좋았다. 슬쩍 흘러내리는 땀도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금세 시원해졌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만난 나비와 아기 새를 보며 신랑이 무심코 던진 말에 함박웃음이 났다.

"나무가 새로 변했으면 좋겠어. 그럼 같이 자전거 탈 때 옆에서 날아올 수 있을 텐데"


'아 배고파, 밥 먹어야지'와 식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인과관계처럼, 앙증맞기 그지없는 사랑의 감정을 꾸밈없이 보여줄 때면 불가항력으로 그 마음에 동요가 된다. 나는 그가 뱉는 이런 류의 문장을 좋아한다. 앞으로는 메모장에 적어둬야겠다.

그 말을 뱉은 뒤 신랑과 나는 마치 짠 것처럼 페달에 힘을 실어 속력을 높였다. 나무가 보고 싶어서였다.


반려견이 새로 변해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다른 형태이지만 동일하게 떠오른다. 직장 워크숍 이동 중 배를 타고 건너는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갈매기를 볼 때도, 출장 중 잠시 들렀던 편백숲에서 만난 토끼 조형물을 볼 때도 작고 하얀 것만 보면 나무 생각이 난다.


어딜 가나 무엇을 보나, 여름 뒤에 따라오는 가을처럼 나무 생각이 당연히 떠오른다. 덕분에 나는 어디서도 무엇을 하더라도 외롭지 않다.





겨울을 시작으로 봄을 지나 여름까지 오면, 대략 계절의 나이는 몇 살일까?

겨울에 태어나 두 해를 흘러 세 번째 여름을 맞이하는 나무는 사람 나이로 약 20대 후반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똥꼬 발랄이라는 수식어를 꼬리에 달랑달랑 달고 다녔던 나무가 어느새 의젓해진 것도 흐르는 계절처럼, 나무의 나이도 조금은 흘러버렸기 때문일까?

얼마 전 오래간만에 찾은 미용실에서도, 요 근래 반려견 운동장에서도, 산책을 하다 강아지 친구를 만날 때에도 종종 아니 꽤 자주 '의젓하다'는 말을 듣는다.


제 몸보다 10배는 넘게 큰 대형견에게도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들어 놀자고 애교 부리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의젓하단다.

제 나이보다 어린 새끼 강아지를 만날 때 유독 그렇다. 그 시절의 나무처럼 사회화가 덜 되어 앞발을 들고 이를 드러내며 놀자고 달려드는 작은 생명체에게 온화하고 넓은 수용력을 보인다. 본인이 마시고 있는 물그릇에 코를 갖다 대어도, 먹고 있는 얼음을 탐내듯 가까이 다가와도 한 번을 짓거나 짜증조차 내지 않는 천사 같은 나의 나무.


태어난 겨울이 다시 오면, 나무는 또 나이가 드리란 생각을 하니 지겹기만 한 여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현실을 잠시 외면해 보았다.





별 일도 큰 탈도 없이 여름을 지내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결국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몸으로 느끼며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반려견과 함께 시작한 이후, 서울에서 진주로 내려와 한적한 일상을 보낸 이후 여름에 대한 감상평은 극불호에서 호(好)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어쩌면 숨이 턱턱 막히는 불볕더위 가득했던 20대가 끝나 30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생긴 여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에 쫓기고 무엇을 쫓았는지 이제는 가물가물해 생각조차 잘 나지 않는 그 시절은 돌아보니 여름과도 같았다. 여름 한 철 무탈히 잘 보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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