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좋은 날

원래 죽음은 예고 없이 평범한 날, 한가운데 뚝 떨어진다.

by 눈꽃



한참 기말고사 공부를 하는데 갑자기 지금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분을 남기기 위해 얼른 메모장을 켰다.


머리와 손의 속도가 다르다. 죽어도 괜찮은 이유를 하나 하나 떠올리는데 손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일단, 죽음을 결심한 건 뜬금없지 않음을 알린다. 나는 가장 평범하고 아무 일도 없는 날 죽길 원한다고 주변에 자주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나면 출근해야하고, 퇴근 직전까지 열심히 일을 하다 왔으니 지금 이 순간만큼 평범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Bruner의 발견학습을 노트에 끼적대다가 아, 죽고싶다 하는 말을 나도 모르게 툭 뱉었다. 그렇게 죽음의 씨앗이 한 톨 떨어지니 이렇게 빨리 자라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급하게 싹이 올라왔다. 지금은 내 머리를 훌쩍 넘어 천장을 뚫고 차디찬 겨울바람 맞으며 위로, 더 위로 보이지 않을만큼 자랐다.


뭔가 어마어마한 걸 이룬 인생은 아니다. 하지만 더 산다고해서 남들 보다 대단한 걸 해낼 인생 또한 아니다. 나라는 사람을, 나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는 살았고 당장 죽어도 아쉽고 안타까운 것 없으니. 미련은 더더욱 없고. 살아 온 시간을 돌이켜 보면 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 안에서 어떻게든 밝은 빛 한 줄기 잡아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며 시계 초침에 떠밀린 나.


왜 살아야 하는가? 내가 살아있는 게 주변 사람을 위한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잔잔한 호수처럼, 잔물결도 일지 않는 그들의 삶은 내가 죽는다면 작던 크던 돌멩이 하나만큼의 흔들림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파동은 사라지고 다시 고요속에 머무를 수 있을거다. 죽음의 여운은 생각처럼 길게 남지 않는다. 상처가 다 아물고 나면 흉터를 보며 피가 줄줄 나던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릴 뿐이다. 그 때만큼의 아릿한 가슴 통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다 괜찮아지리라. 나라는 존재는 너무도 미미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태어날 자유도, 죽음의 자유도 없다. 매번 선택하며 삶을 이어가면서도 시작과 끝을 정할 권리가 없다. 마침표 하나 찍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게 싫다. 아무리 읽어도 끝나지 않는 책을 붙잡고 끙끙대는 것 같다. 이걸 죄다 찢어 사방에 흩뿌려도 욕하는 사람 없을텐데.


죽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나는 다가올 시기에 나올 새빨간 딸기의 달콤함을 알고, 첫눈의 설렘을 겪어봤다. 모든 걸 다 내던지는 사랑도 해봤고 심장 찢어지는 고통을 선사해준 이별도 해봤다. 배가 아플 정도로 웃을 줄 알고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도 짜낼 줄 안다. 여행도 많이 다녔고 무모한 짓도 해봤다. 다가올 새로움이 나를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슬슬, 죽어도 좋지 않을까.


인생을 무한대로 보내면 죽음으로 수렴하는 것을. 내가 맞이할 내일이 누군가는 간절히 원한 날이었다면, 부디 나 대신 행복하게 가져주면 좋을텐데.


아무튼, 오늘 이 시간은 마침표를 찍기 딱 좋을 것 같다. 더 이상 다음 문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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