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꽃 Aug 19. 2021

이천이십일년 팔월 십팔일 목요일

바람이 귓가를 두드리고 지나갔다, 여름이 끝나간다고




  1. 아무도 기다리지 않지만 눈꽃은 즐거워서 쓰는 숫자 일기.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냐 누가 묻는다면 나는 잠깐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아니, 이래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아무 일 없었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고는 내 삶이 터무니없이 지루했다는 사실이 속상해서 무어든 특별하게 포장하려고 애를 쓰겠지. 무슨 일이 있을 필요도 없는데 잔잔한 시간에 괜히 약 오른다.



  2. 파울로 코엘료의 새 책이! 드디어 내 손에 왔다! 신작 알림이 뜨자마자 예약해두고 책이 발매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최애 새 앨범과 파울로 코엘료의 신작은 누구보다도 먼저 손에 넣고 싶은 욕심이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모든 책을 사랑한다. 뉴질랜드에 있을 때도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부탁해서 신작을 받아 읽을 정도였다. 그걸 굳이 당장 봐야겠냐, 한국 돌아와서 읽어라 하는 잔소리에도 꿋꿋하게 고집을 부려 받아 읽었던 책. 아무튼 파울로 코엘료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 뒤집었다. 글의 흐름이나 소재, 심지어 문체까지. 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드는데 내가 꿋꿋하게 서서 버틸 리가 있겠나요?


  2-1.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내가 가장 처음 접한 파울로 코엘료의 책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읽고 뒤통수를 퍽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가장 위대한 짓이 사랑이라니. 사랑이라는 흔하디 흔하고 뻔하디 뻔한 단어를 위대한 미친 짓으로 비유하다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비유에 입을 틀어막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주 주말, 학교 끝나고 서점에 달려가서 베로니카를 샀다. 이 책은 평생 가지고 가야겠다, 죽어도 같이 묻혀야겠다 생각하며. (뉴질랜드로 갈 때 가장 먼저 챙겨 들었던 책이 베로니카였고, 집을 나오면서도 가장 먼저 뽑아 들었던 게 베로니카였다. 베로니카는 내가 어딘가로 길게 떠나게 되면 무조건 챙기는 책이었다.)


  이후, 내 일기 대부분의 시작은 베로니카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했다. 죽기로 결정한 스물다섯의 베로니카를 부르며 나도 그녀처럼 스물다섯이 되면, 죽음을 결심하고 과감히 생의 마감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병원 안에서 있었던 일과 우물 이야기는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라 몇 번이고 필사까지 할 정도였다. 베로니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적고 또 적어 내렸다. 아무 페이지나 턱 펴서 또 읽고, 부러 좋아하는 부분을 찾아 읽기도 하고. 베로니카가 시작이었다. 그 후로 파울로 코엘료의 모든 책을 샀다. 책마다 모든 부분이, 문장에 맺힌 단어들이 내 마음을 울렸다. 집 나올 때 책을 다 가지고 나왔어야 했는데, 아쉽다.



  2-2. 불륜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토성은 이십구 년이 지나면 한 바퀴를 돌아 우리가 태어난 순간 있었던 하늘의 자리에 다시 돌아온다. 그전까지는 모든 것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고, 모든 꿈이 이루어지고, 우리를 가두는 모든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 토성이 이 주기를 완성하고 나면 모든 낭만주의는 막을 내린다. 우리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고, 한번 정해진 방향을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다. 일직선으로 달리는 줄 알았던 삶이었는데, 특별한 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9년마다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토성의 마음은 어떨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바퀴 돌고 온 낭만, 그리고 그다음.


  파울로 코엘료의 글은 항상 이렇다. 꽉 찬 문장인 것 같으면서도 그 사이사이 독자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길면서도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찬찬히 곱씹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2-3. 신작 이야기를 빠뜨리면 섭섭하다. 금요일 밤에 앉아 후루룩 읽고 자고 일어나 또 읽고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책을 한 권 더 샀다. 나는 책을 읽으며 항상 펜과 메모지를 옆에 둔다. 좋아하는 문장이 나오는 페이지를 적고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을 필사하기 위해서이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모든 페이지를 적어 내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느라 발을 동동 굴릴 정도였다. 이번 파울로 코엘료의 신작 제목은 <아처>이다. 활을 쏘는 과정을 인생을 사는 모습에 비유해서 적어 내린 글 안에는 내가 살아오며 막연히 느꼈던 것들이 명확하게 나열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한 때는 너무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 읽는 와중에도 고개를 갸웃거렸던 적이 있는데 불륜 이후로 파울로 코엘료의 책은 다시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필사 한 부분 :



 명인이란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영혼에 잠재되어 있는 지식을 제자가 최선을 다해 스스로 발전해 나가도록 격려하는 사람인 것 같구나.


폭풍우를 탓해봐야 시간낭비일 뿐이니까.


네 표적은 너 스스로 선택했으니 그 책임도 너에게 있다.


실수가 두려워 경직될 때는 망설이지 말고 쏴라. 올바른 동작을 취했다면 손을 떨치고 시위를 놓아라. 화살이 표정을 빗나가더라도 다음번에 더 잘 조준할 수 있는 범을 배울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결코 알 수 없다.


의도는 완전하고 올곧고 예리하고 단호하고 정밀해야 한다. 그 의도가 운명을 향해 날아가는 동안에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이 감명 깊었더라도 너 스스로 직접 경험해야만 진정한 의미가 된다.


  옮겨서 입력하는 이 과정에도 너무 좋네. 잠들기 전까지 한 번 더 읽어야겠다. 안 그래도 요즘 올림픽 때문에 양궁에 홀딱 반해있는데, 아처를 읽고 나니 어디 실내 양궁장에라도 달려가고 싶다. 화살 하나에 실린 철학이 너무도 깊고 짙다.



  3. 아처를 읽고 나니 뭐든 닥치는 대로 읽고 싶어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다시 읽었다. 고1 때 축제 전시를 위해 골랐던 책인데, 당시의 내 나이가 딱 새의 선물을 읽기 좋았던 때 같다. 열두 살에 성장이 멈춘 진희를 만난 열일곱의 나. 얼마나 즐겁게 읽었는지 모른다. 전시장에 적어 둘 책의 구절이 필요해 몇 개 뽑아오라는 선배의 말에 가장 먼저 뽑았던 문장은 이거다.


  성숙한 어른이 슬퍼하는 것보다 철없는 아이의 슬픔은 더 마음 아프게 한다. 그러므로 철없는 사람은 마음껏 철없이 행동하면서도 슬픔에 닥치면 불공평하게도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으레 슬픔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 같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이끄는 삶, 캐내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농담. 세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읽어 내렸다. 배가 고파서 도중에 밥을 먹는데도 씹는 시간이 아까워 책을 읽었다. 다 아는 내용이고 머릿속에 절로 떠올릴 수 있는 문장인데 왜 이렇게 재밌나 싶었다.


  3-1. 안 되겠다. 이북리더기를 사야겠다. 물론 종이책을 좋아하지만, 짐을 더 늘릴 수 없어 안타깝다. 이북으로 읽고 진짜 진짜 진짜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종이책으로 사야지.


 

  4. , 대박. 조금만 쓰고 누워서 뒹굴거리려고 했는데 뭐가 이렇게 줄줄이 비엔나소시지람. 나는 정말 말도 많고 글도 많은 사람이다. 낯가림 때문에 익숙한 사람들 앞에서만 종알대 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글로는 낯가림이 없어 아무 글이 마구마구 쏟아내고 나서 아무나 읽어주길 바란다. 입도 바쁘고 손도 바쁘다. 나는  시끄러운 사람이다.


  5. 브런치로 다른 사람들 글을 종종 보는데 하트하트 찍는 건 어렵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내 헛소리를 읽고 흔적 남겨주시는 분들이 신기하다. 궁금한 건 이 시끄러운 글을 정말 읽고 공감해주시는 건지, 아니면 공감을 얻기 위한 공감인지 궁금하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그러게 무슨 소리일까.


  6. 시작은 수요일, 마침표는 목요일. 이제 진짜 누워서 라디오 들으면서 숨 쉬다 자야지. 아처를 손에 쥐고. 굿-밤! 새까만 꿈 꾸는 밤이 되길!











작가의 이전글 오늘은 7월 마지막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