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와 피해자의 딸.
아빠도 죽고 다 나때문이야. 내가 아빠가 없어지길 바라고, 내가 이런 몸이라서 이렇게 된거야!
라며 나는 헤드라이트만 환하게 빛나는 도로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끝낼 수 있다며 늘어지려던 순간, 아빠가 나타나 나를 엄청난 힘으로 도로 옆 인도로 밀쳐내더니 말했다.
"아름아, 엄마를 지켜주고 구해줘."
뭐? 엄마는 갑자기 왜. 라고 생각하던 그 때 눈 앞에 깊어보이는 우물이 도시 한 가운데 나타났고, 이끌리듯 다가가 그 우물 아래 제일 밑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거기엔 엄마가 고개 숙인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외쳐도, 내 외침이 우물안에 크게 울려퍼져도 엄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난 날은
조사를 위해 엄마를 경찰들이 데려가기를 반복하고 반복하다 며칠째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던 날이었다.
처음엔 그저 엄마가 집에 빨리 돌아오길 기다렸다.
아빠가 돌아가신 직후 나 역시 교복도 못 벗고 씻지도 못 한 채 경찰서에 이틀 하루 꼬박이 지냈었다. 강력계 형사들이 일하고 짜장면을 시켜먹는 그 차가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덮어 자기도 했고, 뒤척일라치면 시끄럽다는 형사들의 말에 움츠러들 수 밖에 없었다. 족적을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내 신발이라던가도 찍어갔던게 기억난다.
엄마 아빠가 따로 자? 언제부터? 사이가 안 좋네
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방어하듯 반박했지만, 정말로 뭐가 이상한지 몰랐던 당시에 나도 이상한 거였구나 싶다.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 되고서부터였나 항상 안방에서 나와 여동생과 함께 잤었다. 아빠는 항상 거실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티비를 보고 잤었다. 그게 뭐? 그게 이상한건가?
이상한 꿈을 꾸고 엄마는 다시는 우리 곁에서 함께 잘 수 없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봐왔듯 욕지거리 한 번 해보지 않고 묵묵히 맞기만 하던 엄마는 결국 엄마의 친구라는 아줌마의 도움으로 말단 깡패 두명에게 보험금을 답례로 자신의 남편을, 우리의 아빠를 청부살인했다. 각방을 쓴 지 오래된 것과 자녀인 우리의 진술로 동기는 충분하다는 심증이 있었기에, 경찰들은 집요하게 엄마를 심문했는데, 보험금을 재촉하던 깡패들의 전화에 덜미가 잡혔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사건 직후 다니고 싶었던 그 교복이 예뻤고 디자인과가 있었던 여고가 아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아직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때, 당시 동사무소에서 발급해주던 식권으로 빵을 사러가다 그 때의 그 형사들을 만났다. 살인사건을 조사중이랬다. 멋쩍은듯 뒷머리를 긁으며 안 어울리게 상냥한 미소를 띄우며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했다. 한 번도 연락한 적 없고 연락처 같은 것도 모르는데.
전학을 갔던 이유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내가 경찰서에 신문 펴고 자던 그 때 경찰들이 1학년 동급생들에게 탐문조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1학년 3반의 아름이네 아빠가 대낮에 자기 집에서 죽었다, 혹시 아름이가 평소에 아빠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니? 아빠 엄청 싫어하지 않았니? 신발은 뭐뭐 신고 다녔니? 같은 질문을 했다고 전학가기전 친구들이 내게 말해줬었다.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수사물과 추리물을 좋아한다. 주변부터 조사를 밟아나가는 건 기본중에 기본이지만, 다음에 또 피해자와 가해자의 자녀 주변을 조사할땐 나처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주일만에 학교에 나갔을 때는
제일까진 아니지만 당시 좀 친했던 친구 한명이
와락 나를 끌어안더니
"아빠가 강도한테 죽다니! 나라면 죽었을꺼야"
라며 정말 많이 울었다. 나는 그 때 울었는지 안 울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저 나를 위로하려는 착한 친구에게 사실은 내가 "나는 지금 살아있어, 죽을수도 있지만, 일단은 살아있다고.." 라는 생각이 들었단 걸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안겨 우는 그 친구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교실 창문 멀리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길러오던 머리를 싹둑 남자아이마냥 자르고 전학을 갔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가 시작되는 첫날에. 학교에선 배려차원으로 당시 가장 친했던, 집 근처에 살지만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던 그 친구가 있는 반에 배정해 주었다.
그리고 새 담임 선생님께서 학기초 가정조사를 했다.
"해당되는 내용에 손 들어"
라고 말했고 이름순으로 앉았던 내 옆자리 급우는 킥킥거리며 중얼거렸다. "헐- 이거 다 손드는 애도 있나?"라며.
같이 안 사는 부모님 있는 사람 손.
아빠, 엄마 중에 돌아가신 분 있는 사람 손.
급식비같은 거 내기 어려운 사람 손.
몸이 계속 아픈 지병이 있는 사람 손.
같은 거였다.
그런 애가 나였다.
옆으로 휜 허리때문에 의식하듯 머리를 바로 세울수록 등이 반대 방향으로 휘기 시작했고, 오늘의 통증에 익숙해질 것 같으면 내일의 통증은 매일매일 새로웠다. 내 척추는 빠르게 큰 S자의 형태를 띄어갔고, 그에 따라 폐가 눌려서 숨이 잘 안 쉬어지거나 소화가 잘 안 되는 일도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상급식을 거르거나 보건실에 누워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별 얘기를 안 했으니 각 과목 선생님들은 보건실 가는 내 뒤통수나 웅크리고 앉아있는 내 등에 대고
"저 년은 맨날 아프대"
"니가 대학생이냐? 학교 뭐하러 나와?"
같은 말을 꽂았다. 그 때 가장 친했던 친구녀석도 새로운 친구에게 나를 소개할때는 재밌다는듯 "얘 대학생이야ㅋㅋㅋ"라고 소개했었고, 아마 별 악의는 없었을테고- 내 기분은 티가 안 났거나 몰랐던걸까. 수업에 집중하지 못 하는 학생이나 땡땡이를 밥먹듯 하는 학생에게 당연한 언사였으니까 그저 묵묵히 내 통증에 대고 속으로 괜찮다 괜찮다 외워댈 뿐이었다.
그 날도 그래서 보건실에 다녀오니 급식시간이 지났고, 돈이 없던 나는 무상급식을 놓쳤으니 오늘은 집에 가서 동사무소에서 나눠준 라면이나 식권으로 김밥같은 걸 먹기전까진 아침부터 내리 굶어야했었다. 그 친구가 내 자리에 내가 못 먹는 딸기우유와 크림빵을 올려두기 전까진.
급우로 거리감없던 친구였고 활발하고 성격좋아 "말순이"로 통하던 친구였는데, 쑥쓰럽다는 듯 "알 너 먹어"라고 말하고는 획- 어울리던 친구무리로 돌아갔다. 내 이름이 아름이라서 "알"이라고들 부르곤했다.
나는 여전히 딸기우유를 못 먹지만, 딸기우유를 좋아하게는 됐다. 눈물 젖은 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원래도 빵을 좋아했었기에 한장에 3천원의 가치가 있던 식권으로 교환해 먹을 수 있는 음식점에 동네 김성환 베이커리가 있어 감사했다.
식권을 내밀며 계산할때마다 항상 반겨주시던 5호선 신정역앞 김성환 베이커리에 부부 내외분께는 정말 감사하다. 덤으로 항상 빵을 얹어주셨는데, 고3 겨울 11월쯤 내 힘으로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 조기취업하고 나서 졸업장도 아직 안 나왔는데 받았던 식권이 아닌 첫 월급으로 당당히 사 먹었던 그 집 빵맛과 그 때 한가득 빵을 골라담은 내 마음은 세상 가장 넉넉하고 행복했다.
또 한번 큰 시험이 다가오기전까진,
아픈 것도 속상한 것도 모두 다 괜찮았다.
나는 살아있고, 내게 주어진 것일뿐,
언젠가 노력하다보면 내가 바라는 오늘이 올거라 믿고 기대하고 꿈꿨다. 그냥, 오늘보다, 어제보다, 그랬던 날들보다 나은 어떤 날들이 올거라고.
그런 아빠도 지나고보니 나에겐 하나뿐인 아빠였고,
그런 엄마도 언제나 내겐 하나뿐인 엄마였다.
나와 내 동생들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