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내서 보여주고싶을만큼 미웠다.
2004년의 11월이 오기전의 이야기.
나는 아빠가 정말 미웠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음과 동시에 인간이하로 무시했으며 없어도 좋다고 증오했었다. 그 마음이 커지고 커져 어느새 그 마음을 큰 딸인 내가 직접 꺼내서 보여주고싶고 증명하고싶어졌던 중3.
그 이전에,
어려서부터 엄마는 정말 요란스럽게 맞았다. 일방적으로. 흔한 욕지거리 하나도 뱉어내지않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아마도 남편이었을 아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썼던 대화가 귓가에 아직도 선하다.
한 번은 무서운 소리가 안방에서 계속 되는 밤이 끝모르고 깊어가던 날, 잠을 못 자고 내 무릎을 꼬옥 껴안고 제발 저 소리를, 저 사람을 멈춰주세요- 같은 소원을 빌고 또 빌었던 것 같다. 소원이 닿았는지 생각보다 일찍 조용해졌다. 되려 마치 그 자리에 사람이 없어진듯한 서늘함에 겁을 잔뜩 먹은 채로 안방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가 아마 초등학생 고학년 쯔음이었던 것 같다.
방바닥에는 아빠의 깨진 안경과 함께 붉은 선혈이 여기저기 번져있었고, 그 붉은 선혈의 시작인듯 엄마의 예쁜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남편으로 돌아온 아빠는 엄마를 끌어안고 마치 자신의 아내가 뺑소니라도 당한양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을 살려주지 않으면 같이 죽어버리겠다- 는 느낌으로 울부짖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때의 엄마는 119의 출동으로 실려가 얼마뒤 치료가 다 끝나 만성 두피염증, 귀염증 같은 것만을 남겼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멈출줄 알았던 아빠는 이제 때려도 쓰러져도 실려가도 엄마가 죽지 않는 다는 것을 배운걸까, 더 많이, 더 자주 때리기 시작했고, 나는 도저히 집에서는 편히 잘 수 가 없어졌다. 공부하라고 만들어진 오래된 향기가 나는 책상위에서만이 모두가 있고, 공부하고, 떠드는 학교만이 제일 조용한 나의 잠자리가 되었다.
그렇게 몇 해가 흘러 곧 그 날이 왔다.
나른한 주말, 무서운만큼 익숙해졌기에 이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냥 자고 또 잤다. 조용해지지 않는 다면 내 귀와 머리가 잠들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아빠는 입버릇처럼 첫째딸인 나를 만났던 순간을 회상하셨고, 아마도 나를 무척 사랑해서,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셨던 것 같다. 그 회상 레파토리도, 잠자는 나를 괴롭히던 그 행동들도 사실은 서툴고 약했던 아빠의 진심이 담긴 표현이었다는걸, 성인이 된 지금의 나는 알게 되었지만, 그 땐 그저 지겹고 지겨운 반복되는 술주정같은 것이었다.
잠자는 내 팔을 있는 힘껏 꺾고 괴롭히며 딴에는 짓궂은 표현도 사랑이고 애정이고 관심이라 하는가보다 싶었지만, 그런 아빠가 정말 너무나도 싫었고, 그 마음 그대로 아빠 가슴에 대못이 되어 박히길 바랬다.
아파, 아프다고! 쫌! 아악! 아흑. 흑..
있는대로 소리를 지르고 울었다. 내 증오와 분노가 이만큼이다-라고 표현하고 싶었다. 아빠는 나를 비롯해 가족 누구라도 어떤 이유에서도 울면 갑자기 아빠가 아닌 사람이 되어 싸늘하고 폭력적으로 돌변했었는데, 나도 그땐 아빠 가슴에 흉터를 내보겠노라 이성을 잃고 울어제꼈다.
그리고 나는 결국 아빠에게 셀수없이 맞고 또 맞았다.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엄마를 떠올리며 맞았다. 그러다 문득 아, 이렇게 맞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졌고, 그제서야 그래도 아빠인데, 아빠도 큰딸이 호소하면 아차! 하고 깨닫고 멈추지 않을까 하는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아빠, 나 아빠 딸이야.. 아빠 너무 무섭고 아파, 그만.. 잘못했어 아빠..
라고 말을 하며, 아빠는 그래도 아빠다 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이내 더 무서운 아빠를 보았다.
이 씨발새끼, 어디서 계속 소릴질르고 울어 씨발, 개새끼, 개새끼, 씨발새끼
아빠는 자기가 뱉는 된발음에 맞춰 리드미컬하기까지 할정도로 나를 계속 걷어찼다. 아아- 이대로 그냥 죽을 수도 있겠다. 아아- 그냥 이대로 내가 죽어서 아빠가 멈출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만으로 고통도 놀라움도 무뎌질때쯤, 당시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연년생 여동생이 말을 툭- 뱉었다.
아빠! 그만해! 언니 진짜 그러다 죽어!
동생은 정말 놀랍지도 않은 이 풍경에 질렸고 짜증난다는 투로 툭- 뱉었다. 그리고 내 배와 옆구리에 퍽퍽 박히던 발길질은 멈췄다. 덕분에 살았나.
나는 대충 추스리고, 집을 뛰쳐나와 집에서 멀지않은 친구의 집에서 내리 몇밤을 잤다.
그리고 며칠 뒤 친구네 계속 살 수도 없으니 결국 집으로 돌아가서 어떻게든 아빠와 눈도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무사히 흘러가길 바라며 없는 듯이 숨죽이며 매일을 보냈다. 그런 도망의 끝을 낸 것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온 나에게 2만원을 내밀며 던진
"아빠랑 계속 이렇게 지낼꺼야?"
라는 정말 놀랍지도 않은 사과의 한마디였다. 돈때문도 아니고, 여기서 달리 내가 어떻게 이 사과를 튕겨낼 방법이 없었고 나는 아빠를 제지할수도 없다는 걸 생생하게 알게 된 직후라 무서웠기에 그냥 끄덕이고 그 돈을 받는 것으로 우리는 화해라는 것을 했다.
그 것도 계절이 바뀌고 잊혀질 무렵,
나는 곧 있음 맘에 안 들던 녹색 담요같던 중학교 고복을 벗고 잘 빠진 남색 고등학교 교복을 입게될 생각에 꽤나 들떠있었고 그 바람에 학교 화장실에서 제자리에서 미끄러져 골반부터 발목, 성장판까지 크게 다치는 일이 생겼다.
야매같은 학교 보건선생님이 침술을 배우고 있다며 책을 한 손에 들고 내 발목 부근을 침밭으로 도배하다못해 뜸도 올리고 나더러 다리와 발을 있는 힘껏 계속 움직이라는 지시를 내림에 따라 점점 더 고통속으로 빠져들다, 평소의 다정한 아빠가 멋지게도 나타나 나를 업고 근처 병원까지 허겁지겁 데려갔다. 그래, 아빠도 아빠다.
중3 이었던 나는 지루하지만 꿀같던 입원기간을 거쳐 마지막 수학여행에 목발과 깁스 투혼까지 불태워 갔다오고는 기대하던 새 교복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또 나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제자리에서 넘어져 아빠의 등에 1년만에 다시 업혀 그 때 그 병원으로 가게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빠를 보았다.
지금 이거 다리가 문제가 아니라, 척추측만증인거 아셨어요? 이거 후천성인데, 다리가 부러지는 사건정도가 아니라 어디 허리를 크게 휠 만한 사건이 있었나요? 이거이거.. 이걸 시작으로 앞으로 이렇고 저렇고.. 사는동안 어쩌구저쩌구
뭐라고? 이 의사선생님이 뭐라는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내게 동네 개인병원 의사는 척추를 따라 못을 박은 사진이라던가 목부터 골반까지 이상한 플라스틱 덩어리를 두른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줬다. 의사의 말과 보여주는 사진을 눈과 귀로만 따라가고 머리로는
"내가 새 남색 교복 아래에 저런걸 입고 딱딱한 몸을 들킬까 만원 통학버스에서 몸을 사려야 한다고..?"
라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빠는 여기가 병원인 것도 잊었는지 내가 눈물을 쏟자 그것도 못 참겠는 듯 언제라도 나를 때릴 기세로 노려보며 "그만 안 그쳐?"라고 다독였다. 나는 그 와중에 또 다시 그런 아빠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어디까지인거야.
겁을 먹고 아빠가 운전하는 차에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 올라오는 설움을 참으며 "이제 어떡하지"라고 온갖 생각을 머릿속에 헝클고 있던 내게 아빠는 말했다.
오늘 병원에서 있었던 일, 들었던 거, 아빠한테 맞았던 일, 다 엄마한텐 말하지마라.
설움과 공포와 두려움과 어디까지인거야- 라는 커다란 절망과 슬픔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뒤 엄마가 내 허리도 안 좋다는 것을 알게된 때는 몇달이 흘러서 내가 입은 옷 위로 양 옆구리가 서로 다른 모양을 드러내기 시작한 때였다. 엄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못 했기에, 엄마는 내가 맨날 컴퓨터 앞에서 포토샵이나 게임 나부랭이 같은 걸 하느라 허리가 망가졌다며 쓴 잔소리와 걱정을 했다. 그리고 곧 나는 보조기라는 것을 착용하게 되었다. 낯선 아저씨가 우리집에 방문해 나와 단둘이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속옷만 남긴 내 몸 위에 정성스레 석고를 치덕치덕 붙여 본을 떴다. 복잡한 감정으로 석고가 묻은 내 몸을 닦아내고 있는데 아빠가 말했다.
힉- 뭔 놈의 보조기가 한번 맞출때 50만원이나해
내가 고대하던 남색 교복아래 차갑고 딱딱한 보조기가 내 상반신을 감싸듯 나는 다시 그 보조기를 망가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듯 보일지도 모른다며 숨기듯 꽉 감싸안고 등교 버스에 올라탔던 그 날 역시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50만원이나 하는 보조기를 도저히 제대로 착용하고 학교를 갈 수가 없었고, 아빠도 엄마도 내가 그걸 착용해야하는 걸 잊은 것 같았다. 꾸준히 착용했다면 6개월에 한번씩 새로 본을 뜨고 고정적 지출이 되었겠지-
나중에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엄마가 인터뷰한 영상에서 엄마는 말했다.
나를 때리는 건 참았지만, 나중에서야 딸이 맞아서 평생 허리가 아픈 채로 살게 한걸 알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뭐 좋은 소리 볼게 있다고 계속 찾아내고 쫓아 본 댓글에는 "애비나 애미나", "콩가루집안", "사형없냐", "이 부모 아래 삼남매도 뻔하네" 같은 글자들이 도배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완벽하고 예뻤던 엄마는 그렇게 사회에서 격리되었고, 나는 아직까지도 그 굴레에 남아 눈을 뜨고 호흡할때마다 아픈 허리의 통증으로 살아있음을 깨닫고 저주하는 매일을 살게 되었다.
이건 다
나 때문이야-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