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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겨울의 일기 _04

폭력적이었던 아빠의 겨울.

by 흔한사람

엄마와 아빠를 한꺼번에 잃게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에서도

나 스스로도 생각하는 한 마디가 있다.


도망치면 되잖아.

죽이지 말고, 당하지 말고, 도망치면 되잖아.




과연 그럴까?

누구라도 실수하거나 후회를 할 때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가정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한 번 겪어보면 다시 선택할 수 있을 때 다른 선택을 해보겠다는 건 누구라도 학습이 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고 행동이다.





엄마가 한 번은 꽤 오래 가출해 있었고, 나와 여동생은 그런 엄마의 행동을 납득하고 있었다. 1분이라도 아빠와 같이 있고싶지않아했던 내게 아빠는 어정쩡하게 웃어보이며 된장국을 끓여봤으니 먹어보라고 말했고, 나는 "아빠가 끓인 걸 먹어야하다니, 아빠 때문이야."라고 쏘아붙이곤 황급히 현관문을 열고 학교로 가버리곤 했었다.


그러다 얼마 뒤 외할머니가 우리집에 찾아왔는데 외할머니 앞에서 갑자기 폭력적으로 변했던 아빠를 보고 외할머니는 맨발로 뛰쳐나가셨고, 엄마는 그 사실을 알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 남편으로부터 엄마의 가족과 우리를 지키기 위해 맞고 사는 쪽을 선택하고 돌아온것이리라.





그렇다면

아빠는 왜 그랬을까.


아빠가 굉장히 폭력적으로만 묘사되었지만, 사실 다정할 땐 다정하고 참 유쾌하고 재밌는 아빠였다. 중학교를 올라가기전까진 거의 매년 여름마다 완도까지 가족여행을 가기도 했다. 파도를 태워주고 맥주병인 내가 물에 빠져 죽을 뻔 할 때 멋진 수영실력을 뽐내며 맥주병인 큰 딸이 울상된 모습에 하하하! 웃었던 짓궂지만 유쾌했던 아빠.


아빠는 큰 딸인 나를 만났던 순간을 정말 많이 회상하셨는데, 그 때마다 나는 보던 TV에서 눈도 안 떼고 입도 안 떼거나, "네네- 그랬겠죠." 라는 감상으로 들었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정말? 내가? 우와!" 하며 턱아래 손으로 꽃받침을 하고 들어줬을텐데.


이제 막 태어난 애기가, 애기는 외계인 같댔는데 큰 딸은 머리숱도 많고 쌍커풀진 눈으로 아빠를 보면서 씨익 눈웃음 치더라니까!


라는 이야기를 참 자주 했었다.






긴 생머리에 쌍커풀진 길고 큰 눈, 서양 미녀같은 날렵하고 오똑한 코를 가지고 차분하고 도시적인 분위기를 풍겼던 엄마는, 나는 물론이고 아빠에겐 늘 아름다웠고 자랑거리였으리라. (이상한 언니 때문에 얼굴팔린 우리 예쁜 여동생님 미안.)


여느집 엄마들이 흔히 그렇듯 가계를 건사하느라 억척스러워지고 단단해지며 갖게되는 말투나 목청도 엄마는 없었고, 수줍게 웃거나 요즘 말로 츤데레처럼 토라져서는 좋아하곤 했다.


아빠는 키가 184cm에 팔다리가 길쭉길쭉, 어깨도 엄청 넓고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항상 짧뚱한 정장바지가 아빠 발목위에서 팔랑거렸는데, 아빠의 짓궂은 낄낄낄 웃음과, 완벽한 음치로 열과 성을 다해 노래하던 모습과 참 어울렸다.


언젠가 꿈에 아빠가 나와 내가 그동안 다닌 회사 동료들이 모두 모인 회식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워주고 계셨는데, 그런 아빠 바지 끝이 여전히 짧뚱하니 촐싹맞아보이는 것을 보고 "우리 아빠, 바지 하나 해드려야겠네"라고 생각이 들고 퍼뜩 눈을 깜빡하니 모든 것이 꿈이었다.





아빠는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하자마자, 치기공소에 들어가 청소를 하고 막일을 했다. 시골에서 자라 육남매를 어렵게 키우시던 부모님 가계에 보탬이 되고싶었을테고, 당시 70년대에 10대였던 아빠에겐 비전도 있고 아마 꿈도 크셨던 것 같다.


덕분에 경력이 20년이 넘어가니 금니를 세공하거나 치아 관련 시술과 수술은 도가 텄는데, 이게 중졸학력에 자격증이 없는 출장 치기공사였다보니, 편한데다 제 값 안 주고 비싼 치료를 할 수 있고- 유쾌한 아빠는 단골도 꽤 많아서 나중에야 알았지만 한창때는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한달에 3천만원까지도 벌었단다.



그러다 단골들도, 새 손님들도 선 치료후 선 금니세공 후에 싹 돌변해서는


"이거 불법이잖아, 내가 신고하면 장사는 커녕 잡혀가거나 벌금형 아니야?"


같은 태도로 아빠가 바친 인생과 노력과 열정, 친절을 바닥에 팽개치고 마구마구 짓밟았다. 금을 가지고 직접 세공하고 출장만 여러번 반복해서 치료해주고 돈도 못 받은 것보다 아빠는 손님들로부터 아마 더 한 상처를 몇번이고 받으면서 힘없이 돌아설 수 밖에 없었겠지-





아빠는 군복무시절에 허리를 크게 다쳐 국가보훈대상이었다. 덕분에 아빠가 계실때, 아빠가 살아생전 끝까지 아팠던 몸에 대해 큰 비용이 들어가지도 않았고, 삼남매였던 우리도 급식비라던가 꽤 혜택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점점 아빠가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니, 사실 약해지기 시작했다.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할수록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려볼수록 나는 아빠가 너무 아프다.



허리가 계속 아파서 아빠는 툭하면 바닥 아무대나 늘어져 나한테 허리나 등을 밟아달라고 했는데, 처음엔 웃으며 아빠 허리를 밟고 아빠도 "아이고 우리 큰딸이 항공모함같은 발로 밟아주니 시원~하다" 하며 하하호호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아빠가 점점 웃음기를 잃더니

"더 세게 못 밟아!!! 있는 힘껏 밟으란말야!!"

라고 소리치고 아빠가 무서워 몰래몰래 입술 쭉 내밀고 차오르던 미움으로 꾹꾹 밟아줘도 아빠는 팩- 일어나 바둑TV를 보거나 했다.


그렇게 나는 아빠의 고통도 상처도 모른 채

집에 빚만 쌓여가고 부지런히 일하는 예쁜 엄마에게 집착하고 때리고 바닥에 늘어져 호통치고 자기 기분 좋을때만 눈치없이 장난치는 아빠를 경멸하기 바빴다.





중학교때 아빠가 입원도 했다. 거의 반년은 입원해 계셨고, 옆에 간호해 줄 사람없이는 씻지도 용변도 볼 수 없을 만큼 큰 수술과 입원이었다.


그 때 난 딱 한번 병문안을 가서 아빠의 용변보는 모습을 보고 "윽" 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었고, 아빠는 그런 나에게 와줘서 고맙다며.. 아마 전학년 통틀어서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아빠한테 맞는 엄마를 보는게 익숙하고, 나도 아빠가 집에 안 들어오는 매일의 평화가 좋았던 철없고 사랑없는 시절이었기에 그 카메라로 친구들 사진과 오늘 나온 급식 따위만 찍고 그랬던 것 같다.


그 시절에 난 테스트용으로 난닝구 바람으로 집을 휘적휘적 걸어다니던 폭력적이지 않은 상태의 힘없는 아빠를 찍었던 사진 한장외에, 아빠를 사진에 담을 생각도, 아빠에 대한 애정도 없는 얼음장같은 큰 딸이었다.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아직까지도 증오하고 미워했을까?

아빠의 웃는 얼굴과 무대응만을 보고

저 사람은 아직 나만큼 상처받지 않았어,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싶어-

라는 잔인한 생각만 가득찬 아빠의 딸이 되었을까.


나중에 부검 결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빠는 간경화 말기로 길어야 2년의 시한부 목숨이었다고 한다. 엄마도 알았다면, 나도 알았다면 우린 좀 더 따뜻할 수 있었을까, 그러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런 와중에도 아빠는 괴한 두명에게 맞서

칼을 맞고도 계속 싸웠고, 복부에 칼을 꽂은 채 그 칼이 돌려지는 치명상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싸우고 싸웠던 거다. 당황한 두 장정이 아빠의 머리를 내려쳐서 아빠는 그대로 쓰러져 치명상의 방치, 과다출혈로 사망하셨다.


거실에 어느때처럼 누워 이불이 덮여진 아빠와, 어질러진 집을 보고도 당시 초등학생이던 막내는 아빠가 자는가보다 하고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여동생이 그 다음 귀가하여 역시 아빠가 평소처럼 자나보다, 집이 어질러진 것은 엄마를 또 때리고 엄마는 나갔나보다- 라는 생각에 무서워서 외면하려다, 아무래도 조금 보이는 피가 마음에 걸려 아빠위에 덮인 이불을 들춰보고 곧장 내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아빠는 처음 기공소에서 청소하고 맞아가며 키우던 70년대부터의 꿈의 쓴 맛을, 가족에게 차마 말하고 위로 받을 수 없었던 현실을 술과 담배와 도박으로 달래고 있었고, 이따금씩 슬픔과 외로움을 감춘 장난으로 나에게 표현하고 있었던거다. 사실은


"아름아, 아빠 정말 많이 아프고 힘들고 슬퍼"


라고.




지금이라면 알아차릴 수 있어, 아빠.
미안해, 아빠를 지켜주지 못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줘서까지 안 하고는 살 수 없도록 방치해서 미안해.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힘든지 눈치채지 못 해서 미안해.

이제는 아프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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