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 지는 사계절을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
겨울.
텅 빈 쓸쓸함과 화려하게 수 놓인 끝 두 대비가 모두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겨울 하면 떠오르는 하얀 눈이다.
한 해 내가 태웠던 마음과 노력과 생각들이 하얗게 내려앉는 재가 되어 이상하게 눈과 마음을 빼앗는다.
아쉬워하라고.
아쉬워해도 된다고.
다음 봄에는 다시 또 많은 것이 피어날 테니
녹아드는 지난 겨울의 재처럼
어느새 말끔히 괜찮아질테니
지난 계절이 아니라 다가올 계절에 하고 싶은 일들이 그려지는 걸 보니 정말 이제 꽤 괜찮구나-싶다. 물론 어느 날엔 또 나약해져 심히 흔들리며 주저앉겠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면 알 것 같다.
내가 내 나름으로 무릎을 털고 일어날테고,
땅을 보며 걷던 만큼 하늘을 보며 멈춰 설 것이고
바라는 것들에 많은 미련이 생겨버렸으니
어떻게든 또 잘 살아갈테지.
지난해부터 전보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비교적 복작복작한 시간을 보냈다. 마치 새 학년이 되어 새 친구들과 이제 막 친해진 양. 다 말소되어 사라진 줄 알았던 어렴풋한 감정들과 하루하루들을 만나고 나니 아쉬웠다. 충분히 가능했구나, 사라지지 않았었구나, 귀 기울이고 들여다보고 손에 잡지 않은 건 나 자신이구나.
다행히 어려서 도피처가 되었던 내 일이 지금은 일찍 시작한 덕에 방황했던 시간들이 있었음에도 지금의 아쉬워진 나를 지탱해준다. 몸이 두 세 개쯤 된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재밌는 일을 해보고 싶지만 어쩌겠어,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교복을 입고 키 높은 건물이 즐비한 강남으로 출근을 하며 시작했던 서투른 사회생활도 벌써 16년 전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직장 선배님 사수님들이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반갑고 즐겁다. 워낙 어려서 다녔던 내가 서른다섯이 되었다고 하니 징그러워들 하시지만, 이내 곧 여러 가지 조언도 해주시고 사람은 만나는지 궁금해하신다.
애정 어린 꼰대라는 걸 아니까.
나 역시 나보다 어린 반가운 친구가 찾아와 말 한 마디 나누고 싶어하는 눈치라면, 열정과 애정을 진득히 담아 뻔한 얘기를 재차 강조해서 말할테지. 조금이라도 도움되길 바랄테니까. 그리고 그런 말들은 다 들리고 닿는 때가 있다. 필요한 때에 닿을 수 있다면 다행이니까 좀 따분해보여도 별 수 없지. 그저 한 치 앞도 못 보는 터프한 젊음들이 무던해지고 심심해지는 것이 아쉽다. 내 것이 아쉬웠던만큼 내가 아끼는 사람들의 젊음과 청춘이 아쉬운 것이다. 분명 저마다 반짝이는 멋진 매력을 가진 사람들인데, 저마다의 일들로 흐릿하고 탁해지곤하니까.
모든 선배님들의 말을 듣는 내내 싱글벙글 웃고 있다가 가벼운 농담이라도 하면, 시간은 징그럽게 흘렀는데 이 인간 그대로네-라며 어이없다는 듯 웃으시는데 그게 또 좋다. 진지하게 말하시다 실소하시는 모습들이 안심이 된달까. 마음속으로 누구에게도 쉬이 부릴 수 없던 초년생시절의 몰라서 저지를 수 있었던 응석을 능글맞게 부려본다. 어쭈 요것봐라?라고 근엄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같이 개구져진다. 선배들도 그 땐 지금보다 어렸고, 지금의 나보다 어렸을텐데 새삼 존경할 부분들이 많은 걸 또 깨닫는다.
제주도에 워크샵으로 갔던 일 외에는 풍경을 제대로 눈에 담을 심산으로 간 적이 없었다. 지난 해 드디어 사랑스러운 여동생들과 제주도 여행을 짧게 다녀왔다. 아기자기하고 웃을 일 많고 크게 핵심적인 기억은 없는데 그게 또 좋았던 여행이었다. 햇빛을 받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촘촘히 빛나는 추억이 되었고, 내 소중한 보물이 늘었다. 사람은 정말 별 것 아닌 것으로 오늘과 내일을 살고 행복하며 웃는구나. 그런데 그 별 것이란게 정말 사소할 때도, 절실한데 무심할 때도 있구나.
세상엔 당연한 사실이지만 튼튼한 고목나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하늘 흔들려서 더욱 멋진 버드나무가 있고, 보기만해도 여행온듯 설레게하는 야자수도 있고, 뾰족한 잎을 가득 품고도 세상에서 가장 푸르른 나무로 자리한 소나무도 있고, 바람따라 뚫린 길따라 흔들리고 줄 선 갈대들도 늘 같은 그 자리에 뿌리내린채 흔들린다.
어른이 된다면 아주 강직하고 튼튼한 고목나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렇지 못할때마다 스스로가 참 실망스러웠다. 유연하게 흔들리고 제 자리를 찾아가겠구나.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전에도 앞으로도 어김없이 이 바람에 저 빗물에 휘청이고 꺾일 테지만 난 또 그대로겠구나.
내리는 눈이 참 예쁘다.
이 긴긴 겨울은 어느새 녹아들 것이고
다음 봄은 곧 다시 혼자 피어나 간지럽힐 것이고
여름은 다시 오래오래 뜨거워 때로 지칠 것이며
가을은 다시 많은 감정들과 함께 잔잔히 찾아올 것이다.
나는 분명 사계절을 어떻게 나는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