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텔마릴린 Mar 22. 2018

[21] 카프카스에서 설악을 말하다.

2부-강원도 속초

유럽과 아시아를 나눌 때, 혹자는 터키의 보스포러스 해협을 기준으로 해협의 서쪽을 유럽, 동쪽을 아시아라 부른다. 대륙이 똑 끊어져 있으니 꽤나 편리해 보인다.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북동쪽으로 한참 물러나 있는 우랄 산맥이 기준이 되기도 한다. 우랄 산맥을 기준으로 동과 서가 각각 유럽과 아시아라고도 한다. 동서로 나누는 것 외에 남북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 기준이 바로 조지아와 러시아 사이에 동서로 놓인 카프카스 산맥이다. 산맥을 기준으로 이북이 유럽, 이남이 아시아. 동과 서로 구분하던 오랜 관습을 생각하면 남북으로 나누는 것이 조금은 애매하고 낯설지만 '너'와 '나'를 분리하고 구분 지을 만큼 카프카스 산맥이 높고 험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회과부도에서 손가락으로 훑어보며 상상했던 그 카프카스 산맥을 보겠다고 201x년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를 그만둔 것이 먼저인지 산을 보겠다는 것이 먼저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하여간 그것을 보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3주의 휴가를 받아 온 남편과 터키 이스탄불에서 만났다. 우리는 빠르게 터키를 둘러보고 갖은 고생 끝에 조지아 국경을 넘었다. 수도 트빌리시에서 다 썩어빠진 마슈르카를 잡아 타고 덜컹덜컹 몇 시간을 달려 카프카스 산맥의 카즈베기 산자락에 있는 스테판츠민다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비가 왔고 추웠고 몸에서 열이 났다. 카프카스 산을 보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비라니! 산은 뿌연 구름에 완전히 갇혀 그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숙소의 식당에서 혼자 여행 중인 호주 남자를 만났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전 세계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회사 그만둔 사람 참 많다. 하여간 그가 말한 전 세계는 말 그대로 '전 세계'였다. 호주를 떠나 아시아에서 여행을 시작한 그는 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거쳐 조지아에 도착한 터였다. 우리는 부엌에 둘러앉아 숙소의 주인장이 담근 비노를 마시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돈이 많이 들지만 그만큼 편리한 부탄 여행에 대하여, 가난하고 더러운 방글라데시에 대하여, 오만의 해변과 캠핑에 대하여, 이라크에 사는 아름다운 쿠르드인들에 대하여 그가 이야기했다. 슬라브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커질 때면 그의 목소리도 따라 커졌고 빗소리가 잦아들 때면 그의 목소리도 작아졌다. 그의 목소리가 작아지면, 나는 혹시나 비가 그쳤나 라는 기대를 갖고는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목소리는 다시 커지고 말았다. 


헌데, 네팔에서 히말라야를 봤다는 그가,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카프카스 산맥 아래에 있는 그가 우리에게 처음으로 꺼내놓은 이야기는 사실 이것이었다. 


"내게 최고의 산은 설악산이야. 정말 아름다웠어. 강원도는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어. 정말이지 최고였어."


"왜 하필이면 속초입니까?"


속초로 간다고 했을 때, 서울에서 왔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왜 하필이면 속초지? 그럴 때면, "그냥... 바다도 있고 산도 있어서요."라고 말하고는 했다. 사실 성인이 된 이후 속초는 내게 그저 어렸을 때 부모님과 피서를 가서 재미있게 놀았던 곳 중 하나였다. 변산이 그랬고 단양이 그랬고 소요산이 그랬다. 어렸을 때 가본 곳이자 머리가 다 커서는 나와 상관없는 곳. 단풍철이면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중년의 단체관광객들에게 점령당하는 조금은 뻔한 곳. 설악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물가물했고, 울산바위와 흔들바위가 헛갈렸고, 속초의 바다가 어떤 빛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속초는 한국의 다른 모든 곳이 그렇듯 그냥 그런 곳이었다. 가깝고, 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가지 않는 곳. 그런 곳을 두고 그가 저렇게 말한 것이다. 설악산이 최고였다고. 강원도가 아름답다고. 부끄럽고 놀라웠다. 카프카스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비 오고 춥고 으슬으슬한 그곳에서 당장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 도대체 설악산이 어떠하길래 저런 말을 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나? 그걸 내버려두고 나는 지금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시간이 날 때면 강원도에 갔다. 7번 국도를 따라 오르고 내렸고, 어느 날은 혼자 울산바위를 올랐다. 그가 옳았다. 설악산은 정말 최고이고 강원도는 정말이지 무지하게 아름답다. 울산바위가 잘 보이는 너른 땅을 사고 싶었다. 하지만 울산바위가 잘 보이는 그렇게 좋은 땅에는 임자가 있었다. 몰타의 지중해만큼 푸르게 빛나는 동해바다가 잘 보이는 너른 땅을 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땅은 엄청나게 비싸고 물론 임자도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마당 한 쪽 없는 낡은 집을 샀다는 이야기.


이곳에 이사온 지 4주가 되었다. 그 4주 동안 사실 별로 한 것이 없다. 월세로 얻은 20년 넘은 아파트 때문에 이런저런 몸 고생을 하였고, 마당 한 쪽 없는 낡은 집은 제대로 보니 낡을대로 낡고 삵아 손 볼 곳이 한 둘이 아니여서 몸 고생 뿐만 아니라 마음 고생까지 하고 있다. 그 낡은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죄다 가난한 사람들 뿐이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그곳에서 십 년을 살았다. 월세 15만원, 20만원... 보증금은 백만원 이백만원 그렇다. 이층 옥탑에 사는 여든의 노인은 우리에게 굽신굽신 몸을 숙이고 사장님과 사모님이라고 깍듯이 높여 부른다. 집주인이 바뀌었다고 인사차 전화를 걸었을 때 그가 한 첫 말은 "저는 여기에 더 살고 싶은데요."였다. 환갑을 앞둔 일층 남자도 내 몸을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우리에게 허리를 숙인다. 아무래도 우리는 그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스테판츠민다, 카즈베기, 카프카스>




<가을, 단풍 끝의 설악산>



<겨울 끝의 설악산>


이전 20화 [20] 떠날 준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