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지만이 백지수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오디션 파일과 지금 방금 들은 백 아무개 신입생의 당돌한 말뿐이었다.
‘얘는 지금 밴드마스터가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얘기인가? ’
지만은 내심 잘 걸렸다고 생각했다. 포부만 있는 전형적인 허풍쟁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었다.
3년째 보고 있는 그런 종류의 신입생들의 결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겉 멋만 들어 동아리에서 공연 몇 번서고는 캠퍼스 커플이나 되어 분란만 일으키다가 결국은 떠나게 될 운명.
이참에 확실하게 이 동아리가 음악 동아리이지 사교동아리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일종의 시범 케이스.
“말만으로는 곤란해. 실력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이 방 옆 방송국으로 가서 아나운서 되는 게 맞을 거야”
이외에도 선배의 많은 독설이 백지수에게 쏟아졌다. 독고풍은 말없이 듣고만 있는 고개 숙인 백지수가 안쓰러웠다.
‘아, 쟤 정말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
불알친구가 선배의 꾸중을 듣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지만선배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그저 백지수의 표정이 한풀 꺾여 고분고분해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백지수는 이런 독고풍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독고풍에게 얘기했다.
“독고풍 선배, 반주로 기타 좀 쳐주시겠어요?”
“어? 으응. 알았어.”
민망한 상황에는 연습용 기타를 부여잡고 대중가요책을 뒤적이던 버릇이 있던 독고풍은 기타 넥(Neck)을 고쳐 잡았다.
그 사이 백지수는 생수를 한 모금 먹고는….
“코드는 머야?”
독고풍이 기타 첫 음을 잡기 위한 코드를 물어보기가 무섭게,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시원하게 뽑은 첫 소절을 시작으로 그윽한 음률이 순식간에 동방 안에 울려 퍼졌다.
‘엉?’
백지수는 당황스러웠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지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현석의 너무나 유명한 곡, ‘비처럼 노래처럼’ 이 시작되었다. 모두 숨죽여 선배의 꾸지람을 듣고 있던 터라 긴장감이 흐르던 동방이었는데, 갑자기 풍부한 성량의 노래가 터져나오니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반주를 부탁하더니 백지수는 첫음도 잡지 않고 바로 부르기 시작한 것. 전주도 없이 부르는 노래였지만 분명한 건 신입생 애송이가 부르는 어리숙한 톤은 아니었다.
독고풍은 부랴부랴 가요책을 찾아 ‘비처럼 노래처럼’을 찾았다. 가요책에는 F코드로 되어있었다. 늦긴 했지만, F코드를 짚어 기타를 쳐보니...
‘어? F코드가 맞네?
얼이 빠져있던 독고풍은, 한 참 만에 아르페지오 주법으로 따라 붙어 백지수의 노래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따로 마이크도 없었지만 5~6평 남짓한 동아리방은 사랑 노래이긴 했지만 백지수의 보컬로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기교가 많진 않지만 기억을 떠올리듯 담담하게 모두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다.
노래를 듣고 있는 순간만큼은 각자의 추억 속 사연들이 몇 줄의 가사 안에 빙의라도 된 듯 모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
클라이막스다. 백지수는 고개를 들어 눈을 감은 채 목을 놓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희뿌연 추억이 과하지 않은 비브라토로 장식되고 있었다.
독고풍도 숙였던 고개를 들어 몰입하고 있었다.
통기타는 보컬의 마지막 가창을 이어받아 마지막 현까지 부드러운 스트로크로 마무리하고 나서야 여기저기서 참았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허.”
“..... 말도 안 돼.”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신입생의 노래에.
눈을 뜬 백지수의 앞에는 다소 놀란 동방 사람들의 눈길이 머물러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지만의 표정은 놀라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한결 누그러시더니 겸연쩍어 하는 듯 했다.
“잠시만요.”
그러나 이어지는 백지수의 한마디가 안도의 숨소리마저 사라지게 만들었다.
“다시 해도 되나요? 노래가 좀 심심했던 것 같은데요. G코드로 다시 부를 순 없을까요?”
'야 백지수, 미쳤어?'
독고풍이 다급하게 백지수의 귀 곁에 속삭이며 말렸다. 완벽주의자 지만에는 '다시'란 없었다.
“그건 안 되지.”
지만이 다시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신입생. 키가 안 맞았어. 감성은 괜찮은데 기술은 아직 모자라.”
아쉽다는 표정들, 백지수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기대는 안 했어. 하지만…. 실제 무대에서도 보여줄 수 있을까, 그 감성?”
“?”
0.1초의 경직, 1초의 생각, 2초 서로 간 분위기 파악 후,
“와~!”
나직한 탄성 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졌다. 모두 지만 선배의 말 뉘앙스를 계산하는데 약간의 오차가 있어서였을까, 엇박자 후에서야 그것이 이 까다로운 선배의 칭찬임을 알고 그제야 반응이 터져 나왔다.
환하게 웃는 백지수.
독고풍은 비로소 웃고 있는 백지수를 바라보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지만 반면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술을 그렇게 마시고 기껏해야 어제 하루 정도 연습할 시간밖에는 없었을 텐데 저런 깊은 감성을 담는 게 지금 가능한 상황인지 어안이 벙벙해했다.
그리고 또 하나, 어떻게 첫음을 정확하게 F코드로 맞출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설마 저 녀석 진짜로 술을 많이 마셔서 음악 천재라도 된 건가?'
동아리 사람들 모두 잘했다며 백지수의 어깨와 머리를 탁탁 치며 격려해 줬다.
지만은 신기한 듯 독고풍을 바라보며 첫 소절을 내 뱉는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절대음감은 무슨, 우연이겠지.”
지만 선배는 나에게 물었다. 포지션 지원은 왜 안 했으며, 다른 뜻이 있는 거냐고 어깃장을 놓고 있었다.
‘포지션 지원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는데…?’
그리고 그 다음 든 생각은….
‘모든 포지션을 섭렵한 밴드 마스터가 되야 해.’
한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입밖으로 표현해 본 적도 없는데 밴드마스터를 해야 겠다고 말하는 내가 낯설었다.
지만 선배의 물음에 답하는 순간 머리속은 마치 열대지방 스콜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햇볕 쨍쨍한 맑은 날씨인 줄 알았으나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옆에서는 심각한 폭우가 내리고 있는 현상.
그 말도 안되는 생각은 1,2초의 시간차를 두고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걱정으로만 가득찼었던 내 황량한 자아가 거침없는 김현석의 자아로 인해 단비처럼 적셔지고 있는 듯했다.
사실은 어제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김현석의 ‘비처럼 노래처럼’을 오디션곡으로 하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이후에는 그 곡이 ‘F코드’라는 것을 갑자기 누가 가르쳐 준 듯 알게 되었다.
그러고는 내 방 모퉁이 구석에 세워져 있는 내 세고비아 기타에 눈이 갔다.
기타를 잡고 쳐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현을 누르고 있던 왼손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듯 아팠다.
‘기타는 아직 무린가? 기타코드를 잡을만큼의 굳은살은 하루 만에 생기지는 않으니까.’
그러고는 기타를 칠 수 없으니 악보를 더는 보지 않았었다.
신기한 건 노래 연습을 할 때였다. 내가 좋아하는 김현석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정확하게 F코드로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악보를 보고 들어본적은 있지만 기억날리 없는 모든 악상 기호와 노래의 음정이 동시에 매칭이 되고 눈앞에 그려지고 있었다.
‘신기하다! 이 노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노래처럼 완벽하게 부를 수 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평소의 내가 아니다. 이 노래는 왠지 내 노래인 것처럼 자신이 있었다.
독고풍에게 기타 반주를 주문했다.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두 손가락으로 생수통 머리를 잡고 마이크 삼았다.
난 노래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노래가 끝났다.
이건 내 노래인게 확실하다.
가슴이 뜨거웠다.
어쩌면 당연하였다.
김현석이라면 다시 태어난 기분일 테니까.
그런데….
지금 이 노래는 뭔가 아쉬웠다. 두 음 정도는 올려도 무리 없이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원키보다 한음 정도만 올리면 좋았을 것을.
내 몸과 영혼, 그러니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간의 차이가 있었다. 몰랐지만 조금만 조율을 한다면 이전보다 훨씬 좋은 소리를 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시 해도 되나요? 노래가 좀 심심했던 것 같은데요. G코드로 다시 부를 순 없을까요?”
지만선배에게 요청한 재도전의 기회는 거부당했다. 나에게 기술이 모자란다고 한 것 같다.
‘기술은 걸지도 않았는데….’
“기대는 안 했어. 하지만…. 실제 무대에서도 보여줄 수 있을까, 그 감성?”
아직 나는 기술을 걸지도 않았다. 노래의 느낌 정도만 보여준 것에 만족해야 햇다.
감성만으로도 내게 기대한다니 앞으로 기술이 들어간 내 진짜 실력을 보면 과연 어떤 반응을 할지 사뭇 궁금했다.
“백지수 수고했어. 먼저 가도 좋아. ”
고맙게도 또다른 신입생 한 명이 오디션 결과는 언제 나오냐고 물었다. 병수회장이 안내를 했다.
“내일 대자보를 통해서 공연에 참여할 인원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동기들과 선배님들은 오늘 뒤풀이가 있습니다. 상의할 것도 있고 하니 남아 주시고요. 나머지 포지션 지원자들은 계속 오디션이 있으니 준비해 주세요.”
막 9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삐삐 치라고 독고풍에게 슬쩍 신호를 보내고는 바로 가방을 챙겨 동방 문을 나서 막차를 타러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스타크래프트의 ‘Show me the money’ 치트 키를 쓴 기분이었다. 그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보물 같은 재능이 갑자기 생긴 거니까.
하지만 요행수를 써서만 인정받고 싶진 않았다. 나도 나대로의 노력을 해야 했다. 꿈에서 김현석이 말한 대로.
가령 내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인 약점. 운동을 좋아하지 않아 아무런 근육도 없이 미소년의 몸매라는 점. 재수할 때부터 피긴 했지만, 담배도 하루 한 갑 이상 피니 폐활량이 좋지 않아 숨이 짧다는 점. 술도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더 많이 좋아한다는 점….
‘술을 어떻게 끊어? 사회생활 할 때 필요한게 술이잖아.’
나대로 노력해야 하는데, 운동, 담배까지는 어떻게 해보겠는데 술은 도무지 끊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내가 술주정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건 패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술 마시는 것을 제외한 모든 신체적 약점을 줄 수 있는 것은 피하고 음악하기 좋은 몸을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내게 갑자기 생긴 불가사의한 능력만으로 음악을 잘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용납하지 못할 것 같았다.
소프트웨어가 남의 것이라면 하드웨어는 나의 노력으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렇게 내 ‘몸’을 단련한다면, 그간 엄두도 못 내고 있던 기타도 왠지 빠르게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완벽한 밴드마스터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리 기타를 오래 쳐도 손가락이 아무렇지도 않으려면 굳은 살 만들기부터 시작해야 했다.
"아차차, 차 놓칠라."
이렇게 혼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해 본 것도 오랜만인 것 같았다.
후다닥 스쿨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목요일 막차 시간대의 스쿨버스 안은 막걸리 냄새와 벚꽃 냄새가 뒤엉켜 묘한 공기가 느껴졌다.
마이마이 카세트가 오토리버스 될 때, 진동으로 삐삐가 왔다. 번호를 보니 독고풍이었다.
‘2468 1472’
‘삐삐 암호인가?’
2,4,6,8 짝수이니 ‘짝짝짝’ 손뼉을 친다는 뜻이고, 1472는 일사 칠이, 일사천리라는 뜻이다.
독고풍이 박수를 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연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번 공연에 설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야호!!'
하마터면 만원 스쿨버스에서 소리를 칠 뻔했다.
‘이제부터 나는 무색무취 인간이 아니야. 나는 뮤지션 백지수가 되는 거야.’
버스는 기분 좋게 사당사거리를 미끄러지듯 지나서 탄력을 받았나? 까치고개를 넘는데 힘들이지도 않고 오르막을 훌쩍 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