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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

소설

by 피터팬신드롬

(3월 30일 수, 2차 오디션 D-1)


‘아! 헤드 클리너는 영상 재생이 안 되지!’



“지수야, 아직도 술이 덜 깼냐? 멍하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독고풍은 내가 지금 숙취에서 못 헤어 나오나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술이 덜 깨기도 했지만 내가 멍한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제 비디오 속 장면과 헤드 클리너.


정확히 말하면 영상 재생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기억에는 분명히 빠른 재생 장면을 본 것 같아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꿈.


그 꿈속에 나타났던 김현석과 그가 한 말.


‘너의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다?’


그렇게 말했었던 게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근데, 네가 곡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


독고풍은 자기가 연주하고 있던 곡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에 놀라는 눈치였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독고풍의 눈을 애써 피했다.


‘글쎄? 내가 ‘Just the two of us’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


갑자기 확인하고 싶은 게 생겼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신없이 동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내가 향한 곳은 ‘대우다방’.


대우다방은 찻집을 겸하는 교내 식당이다. 요일별로 식사 메뉴가 바뀌는 대학생들의 원스톱 아지트.


그곳에는 레코드판을 제법 많이 소장하고 있는 디제이 박스가 있었고, 실제로 장발의 디제이가 담배를 늘 입에 달고 들어앉아 음반을 틀어주었다.


자기를 마치 라디오 DJ 이종환쯤으로 알고 있는, 겉 멋들 린 느끼한 남자였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


숙취로 속이 쓰려서 쌍화차를 시켜서 달걀을 까 넣고 홀짝거리면서 생각했다.


내가 ‘Just the two of us’ 정말 알고 있는지를 눈으로 귀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때마침 디제이가 있었고 신청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디제이 박스 창에 메모지와 펜을 들고 왔다. 그리고는 생각할 틈도 없이 메모지에 노래 제목을 쓰고는 신청곡 바구니에 넣었다.


오늘도 바구니에 쪽지가 가득했다.


나와 상관없는 곡을 듣고 앉아있는 게 고역이 될 때쯤….


“원더풀 봄날의 정오, 어느덧 런치타임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점심을 드시나요? ”


역시나 디제이의 머릿기름 같은 느끼한 멘트가 마지막 내 참을성을 무너뜨리는 순간!


“오전의 마지막 곡을 띄워드릴게요. 곡은 ‘ Just the two of us ’. ”


‘드디어!’


“그런데 특이하게 원곡자의 노래가 아닌 ‘김현석’이 부른 것으로 신청하셨네요. 정말 운이 좋은 분입니다. 비운의 가수 추모 공연 ‘김현석 LIVE' 실황 앨범이 마침 있었네요. 김현석의 ‘Just the two of us’ 틀어드리면서 모두 점심 맛있게 드세요.”


‘!’


누가 노래하든 확실히 나는 생전 처음 듣는 노래였다.


하지만 웬일인지 내 머릿속에는 입력이 되어있는 노래였다.


‘이게 지금 가능한 건가?’


특히 김현석이 부른 그 노래는 몇천 번이고 부른 듯 익숙했다. 사실 김현석 노래는 다 알고 있었지만, 이 노래는 원곡자가 따로 있었다. 심지어 흥얼흥얼 따라 부를 수 있다니. 따라 부른다는 말이 무색하게 바로바로 다음 가사가 생각이 났다. 그것도 영어로.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도 음악 속 모든 악기가 무슨 소리인지 아는 것도 그렇고, 동방에서 독고풍의 기타곡의 제목부터, 알 리 없는 가사까지 생각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김현석이 커버한 노래라면 알 수 있는 건가?


그리고는 생각이 났다. 김현석의 또 다른 말이….


‘너의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다?’


확실해졌다. 그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나서부터 PC통신을 하기 위해 모뎀이 켜진 것처럼 요절한 김현석과 내가 지금 연결되었다는 것.




(D-day) ‘메아리’ 목요 총회 시작 1시간 전.


매일 아침부터 이 작은 동방에 매일 출석 도장을 찍는 나로서는 오늘은 좀 낯선 풍경이었다.


한두 명 밀물 썰물처럼 오가던 신입생들도 오늘은 웬일인지 자기 자리라도 있는 듯 붙박이처럼 앉아있었다.

그것도 배치되어 있는 악기 자리마다 앉아서 열심히 악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각자가 들고 있는 악기를 다루며 제법 그럴싸한 소리를 내면서도 끝까지 다 보여주진 않았다. 평소와는 달리 사뭇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오디션이어서 그런가?


“오늘은 아침부터 동방이 북적거리네.”


시니컬한 독고풍이 의외로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내가 앉아있는 꺼진 소파 옆 철제의자에 앉아 중얼거렸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야, 2차 오디션이 문제가 아니라 이번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관장하게 될 ‘디렉터’가 오시거든. ”


“디렉터?”


“웅, 디렉터는 매년 동아리 정기공연에 관한 모든 것을 관장하고 지휘하는 책임을 맡게 되지. 특히 음악적인 성과는 이 디렉터의 능력에 따라 좌지우지돼. 이번 공연은 지만선배가 맡게 되니 분명 성공적인 공연이 될 거야.”


‘그 디렉터가 참관하는 오디션이라서 그런가? 1차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인걸?’


지만 선배를 본 적은 없었다. 가끔 동방에 오는 9기 선배들의 이름을 달달 외워야 하는 건 암묵적인 신입생의 의무 사항이었다. 악기를 다루거나 노래하는 선배들을 눈에 담고 이름과 매칭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 외에 간식을 사 오는 원로 선배들도 있긴 했지만 ‘디렉터’라고 지칭할 만하게 실력을 보여준 이는 없었다.


“지만 선배가 누군데? ”


디렉터를 할 정도의 선배라면 분명 음악을 잘하는 선배일 것이다. 독고풍에게 선배에 관해 물었다.


“메아리 7기이자, 의대 본과 4학년 ‘하지만’ 선배. 기타가 예술이지. 이번 메아리 10주년 공연 디렉터를 맡게 될 거야. ”


6시. 총회 시작.


9기 회장인 ‘나병수’ 선배가 회의를 진행했다.


얼핏 독고풍이 병수 선배에 대한 얘기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93학번인데 자신보다 나이가 1살 어리다고 했다. 7살에 학교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결국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학번으로 보나 동아리 기수로 보나 선배인 셈이었다.


지난주 총회 뒤풀이 때, 병수 선배가 사람들 성화에 못 이겨 즉석에서 노래를 했었다. 동아리 간판 보컬이라고 할 만큼 그때는 너무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때의 기억을 다시 헤아려 보니 지금은 확연히 달랐다.


‘전형적인 발라더의 목소리였어, 그렇지만 뱃심이 부족하고 목으로만 부르는 게 문제더군. 정확히 음을 찍지도 않고 음 꼬리가 플랫돼서 쓸데없는 멋을 부리고 있었지.’


툭툭 튀어나오듯 자동으로 나오는 평가질에 내가 놀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알고 보면 별 것 아니었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근데 나는 언제 그걸 알게 된 거지?


“공고한 바대로 올해 창립 10주년 메아리 정기 공연을 특별하게 꾸밀까 합니다. 우선 구체적인 안은 차차 작년과 마찬가지로 공연 주요 멤버들과 상의할 참이고….”


모두 회장 나병수의 말에 경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허름한 동방 판자 문이 열리며 다부진 몸매의 누군가가 들어왔다.


“미안, 좀 늦었다.”


동아리방만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이 토요명화 인트로에 나오던 모세의 홍해처럼 갈라졌다.


‘저 사람이 하지만 선배군’


덩치는 작았다. 콧대가 날카로웠다. 한쪽 어깨에 전자기타 가방이 한 몸처럼 매달려있었다.


순간 나는 9기 선배들이 '지만' 선배를 바라보는 눈빛을 훔쳤다.


그것은 선배여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경심이 배어있는 눈빛이었다.


‘그래, 저 선배가 ‘메아리’의 중심이구나!’


이윽고 이 호기심 유발자 선배는 짧게 인사를 하고는 메고 있던 기타가방에서 전자기타를 조심스레 꺼내어 들었다.


의대를 다니려면 여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닐 텐데, 거기에 디렉터를 할 만한 사람이라면 대체 실력이라는 게 어느 정도일까 궁금했다.


‘선배, 이번에 작곡한 노래가 있다면서요? 들려주실 거죠? 네? ’


선배 중 누군가가 애교를 부리며 하지만 선배를 부추겼다. 평소에는 동방에 잘 나타나지 않다가 곡을 새로 만들었거나, 아니면 동아리에 중요한 대소사에 구세주처럼 나타나곤 했었다 한다.


‘응. 몇 곡 만들었는데, 그중에…. 어제 만든 곡이야. 아직 손 볼 때가 많으니 감안하고 들어. ’


마치 토크쇼에서 짓궂은 팬들의 요청에도 주저 없이 개인기를 시전 하는 연예인처럼, 거침이 없었다.


지만선배의 핑거링은 깔끔하고 은은하게 전주로 흐르고 있었고, 아쉽게 전주가 끝난듯 싶을 때, 크게 들숨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입술을 떼었다.


‘시계추 진동 같은 나의 삶의 그녀는 내게로 살며시 다가왔지,

내 맘에 자리 잡은 그녀의 존재는 내게 인사도 없이 떠났네~

… 바보 같은 이런 생각도 언젠간 변하겠지. 앞으로 내가 찾을 인생길이 날 이끌어 줄 테니까.’


아르페지오 주법의 아름다운 선율이 가사를 설득력있게 장식하고 있었고, 기타 소리까지 멈추자, 숨죽이며 듣고 있던 동아리 선후배들의 박수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역시 하지만 선배야. 특히 기타를 치면서 베이스 현으로 음만 찍었을 뿐인데 누가 봐도 지만표 음악이라는 걸 알 수 있지. 저게 지만 선배의 음악이지….”


독고풍은 연신 감탄했다.


‘저 정도면 이 동아리의 중심이 된다는 건가?’


나는 지만 선배의 노래가 그렇게 놀랄만하다고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생각이었다. 머릿속은 상황 판단을 위해 빠르게 시뮬레이션 중이었다. 지금 듣고 있는 노래가 문제가 아니었다.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듣는 귀가 너무나 다른 것이 놀라웠다.


“ 자, 자, 자 이제 모두 이미 공지한 바대로 이번 10주년 공연을 위한 2차 오디션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병수 선배가 어수선한 동아리방 주위를 환기했다.


“메아리에서는 전통적으로 정회원 한 명과 새내기 한 명이 한 쌍으로 스승과 제자가 됩니다.

일단 신입생 오디션 때 지원해 주셨던 포지션별로 팀이 될 것이고, 포지션이 정해지지 않으면 이번 공연에는 아쉽지만 참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는 병수선배는 나를 흘깃 쳐다봤다.


‘일종의 도제 시스템이구나. 나는 포지션 신청을 안 했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새내기들은 크게 5가지 포지션에 지원했다. 새내기는 도합 11명. 그리고 작년부터 공연에 참가했었던 9기 선배는 5명.


건반 2명

일렉기타 3명

베이스 1명

드럼 2명

리듬기타 및 보컬 2명

미 지원자 1명


“각 포지션 지망생들은 오늘 오디션을 보고 평가를 통해 사수가 지정되고 공연 연습을 함께 진행해야 합니다.”


명실공히 동아리 정예멤버가 되기 위한 진짜 관문인 셈이었다.


그렇게 다섯 파트의 지원자들의 오디션이 차례차례 진행되었다. 포지션 미지원자인 나의 경우에는 마지막 차례였다.


건반주자 대상 오디션부터 시작...




오디션이 중반을 넘어 시간은 벌써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스쿨버스 막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야 드럼 주자 오디션이 시작될 참이다.


내 차례는 11시는 족히 넘어야 올 것만 같았다.


“저. 죄소안데 제가 먼저 오디션을 보면 안 되겠습니까? 막차 시간이 다 돼서…. ”


순간 동방은 찬물을 끼얹듯 얼어붙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피곤할 법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최고참 하선배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데, 한낱 신입이 집에 간다고 먼저 오디션을 보겠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새내기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고, 6기 선배들의 표정은 매서워지고 있었다.


독고풍만이 내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미쳤냐고 눈 신호로 소리치고 있었다.


“ 좋아. 먼저 해봐. 당찬 새내기네…. 그런데, 포지션 신청은 안 했네? ”


나 때문에 얼어버린 동방의 정적을 '하'선배가 깼다. 그리고는 지난 오디션 때 제출했었던 지원 신청서를 뒤적거렸다.


“포지션 지원을 하는지 몰라서 않은 거야?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거야?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거야 신입생?”


내가 만든 정적을 깨더니 하 선배의 말에 더 차가운 정적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 정적으로 인해 일제히 모든 시선이 내 입술에 꽂히고 있었다.


아무런 관심도 가져주지 않던 나 ‘무색무취 인간’에게.


“저는 모든 악기를 배워보고 싶습니다. 밴드마스터를 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밴드마스터라는 단어가 난데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밴드 마스터 말뜻이 뭐더라?’


배구 코트의 공처럼 주거니 받거니 말을 뱉고 있었지만 내 눈 또한 독고풍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입과 눈이 순간 따로 놀고 있었다.


거침없이 생각을 입 밖으로 말하는 내가 불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관심 세례에 가슴이 뛰었다.


이제 내 차례다.


이제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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