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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색무취 인간

소설

by 피터팬신드롬

대학교 앞 골목식당에서 두부김치에 두꺼비 소주를 6병째 마시고 있었다.


아무리 두 사람이 먹고 있다지만, 치사량은 진작 넘긴 상태. 그래도 정신은 멀쩡했다.


“지수야. 이제 집 가야지. 막차 시간 놓친다. 술 그만 마셔.”


대작하던 독고풍 녀석이 내 손에서 술병을 빼앗았다.


“응, 가야지. 그래, 가야지 낙성대.....”

“임마, 술 마신다고 네가 뭐 음악 천재라도 되겠냐?”

“그렇지? 그럴 수만 있다면 여기 있는 소주 내가 다 마셨지.”


술을 미친 듯이 마셔서 정말로 음악 천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혀만 꼬부라지는 게 아니라 생각도 꼬부라지는 모양이다.


이때껏 무색무취의 인간이었다.

색깔도 없고 취향도 없는 오로지 공부만 하던 기계.


그렇다고 잘하는 공부도 아니었다. 남들보다 1년 늦게 대학에 들어온 것도 서러운데,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독고풍 녀석도 선배라고 불러야 하는 그냥 뒤처진 인생이었다.


대학에 와서 처음 "취한다."라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음악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한 그때부터였다.


곡을 만들고, 노래하고, 무대에 서는 것은 단순히 음악을 듣고 따라 부르며 즐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사람을 취하게 만들고, 나를 기분 좋게 미치게 만드는 술과도 같은 것.


음악은 내게 처음으로 머리로만이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느끼게 해 준 차원이 다른 세상이었다.


“어휴... 술값은 내가 낼 테니까. 스쿨버스 정류장까지 갈 수 있지? 좀 있으면 기숙사 통금시간이라 먼저 일어난다.”


“응? 어, 알았어. 잘 들어가. 오늘 고맙다 친구! 아니, 선배님!”


독고풍이 가고 나 혼자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대화할 친구가 없으니 취기가 확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이렇게 취하게 음악을 할 수 있었다면.


순수한 호기심이었지만 난생처음 음악 동아리에 1차 오디션을 합격할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걱정을 할 줄은 몰랐다.


‘우리 동아리의 존재 이유는 무대야. 그러니 아무나 세우진 않아. 미안하지만 재능이 없으면, 아니 보여줄 만한 잠재력이라도 없으면... 버틸 수 있겠어?’

‘열정이 보여서 합격은 시켰지만... 그렇다고 너를 무대에 올릴 수는 없지 않겠어?’

‘기타 칠 줄 알아? 노래는 잘 불러? 그게 아니라면 박자라도 잘 맞춰? 백지수, 잘 들어. 음악을 좋아하는 거랑 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거야.’


동아리 선배들의 싸늘한 평가는 절망적이었고, 그 절망을 이겨 낼 수 있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2차 오디션이 통보된 건, 고작 오디션 날까지 3일이 남은 상황.


꼭 통과하고 싶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3일 만에 음악적으로 뭔가를 보여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력을 보여줘야 하는데, 보여줄 실력이 없으니까. 잠재력을 보여줘야 하는데, 나는 너무 평범했으니까.


태어나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하고 싶은 걸 잘해보고 싶은 것뿐인데.


무술을 배우고 싶은 제자가 무거운 물동이를 나르고, 청소부터 배우듯이 동아리방을 그렇게 내 방처럼 쓸고 닦았는데, 누구 하나 기타 코드 하나, 노래 연습 한번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았으면서.


재능이 없으면 음악은 포기해야 할 사치품 같은 것인가?

무색무취 인간에게 음악이란 세상 속 사람들은 친절하지 않았다.


“한심하군, 내 신세가...”


이제는 진짜 막차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아니 이 할배가!”


아까부터 목소리가 커서 신경 쓰이게 하던 옆 테이블, 중년 남자가 이제는 아예 목청을 놓았다.


아까는 없었는데 한 노인이 중년 남자 앞에서 우두커니 서서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지금 어떤 시대인데 나한테 사기를 쳐? 껌 한 통이 무슨 1000원이나 하냐고! 안 사요, 안 사!”


껌을 파시려다 상대를 잘못 골랐는지, 껌을 팔기는커녕 욕만 듣고 있는 노인이 왠지 딱하게 느껴졌다.


‘세상은 노인한테도 친절하지 않구나.’


동병상련일까, 술김에 생긴 오기일까.


나도 모르게 남자들과 노인 사이로 끼어들었다.


다짜고짜 가방을 챙기고 할아버지 손을 잡고서 술집을 도망 나오듯이 나왔다.

등뒤로 육두문자가 날아들어왔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빠르게 걸었다.

술집에서 멀찍이 코너를 돌자마자 어디 다친 데 없으신지 물었다.


“응 괜찮네. ”

“가지고 계신 껌 몇 개나 남았을까요? ”

“5개 남았네”

“그럼 저주세요. 5,000원이죠?”

“아니 만원. ”

“예? 가격이 벌써 2배로 올랐네요? ”

“이건 그냥 껌이 아니야. ”

“무슨 껌인데요? ”

“천재가 되는 껌이라고 해두지. ”

“예? 천재요? ”


나와 독고풍과의 술주정을 들으신 건가 싶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를 놀리시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왜 그랬는지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 껌 제가 모조리 사겠습니다! ”


만원을 할아버지 손에 쥐여 드리니 꼭 돈을 움켜쥐신다. 사실은 내일 하루치 용돈이었다. 스쿨버스 회수권 빼고는 그 돈이 다였다.


돈이 껌으로 둔갑하는 셈이었지만 뭐라도 꼭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근데 껌이 지금 없어.”

“예?!”

“집에 있는데, 나 좀 집에 데려다줘. 온종일 돌아다녔더니 걸을 힘이 없네. ”

“음…. 업히세요.”


어딘지도 모르긴 했지만 이미 스쿨버스도 놓쳤으니 ‘천재가 되는 껌’이라도 받자는 심정이었다.

20분쯤 걸었나 싶었다. 다리에 한계가 올 때쯤 할아버지가 다 왔다고 했다.


‘하제의 누리? 여기에 이런데가 있었던가?’


간판 이름이 독특하다. 황금빛 네온사인이 은은했다. 영어로 "하제 누리"라고 쓰여있다. 순우리말을 좀 아는 편인데, 하제는 어제의 반대말인 '내일', ‘누리’는 세상의 순우리말.


‘내일의 세상?’


이름이 멋졌다.


“음, 여기가 맞아요?”

“어 맞아. 아들이 하는 가게야. 머 하고 있어? 어서 들어가지 않고?”


주춤하는 나를 무릎으로 채근하시니 업은 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오래되어 보이긴 했어도 꽤 분위기 있는 조그마한 카페다 싶었는데….


“이게 다 몇 장이나 돼요?”

“몰라 아들 녀석이 돈도 안 되는 거 이렇게 모으다 보니”


LP 판이 ㄱ자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렇게 한 면을 다 책으로 채운다해도 1000권이 넘게 들어갈 테지만, LP 판이면 5~6000장은 거뜬히 들어갈 정도였다.


장발의 턱수염이 수북한, 키가 큰 가죽 재킷에 락커 복장을 한 건장한 초 중년 아저씨가 닦고 있던 레코드판을 놓고 인사를 했다.


“아버지를 모셔다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 우선 좀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그보다 할아버지가 천재가 되는 껌을 주신다고 했는데…. 하하하. ”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를 내 등에서 언제 내려드렸는지, 어디로 가셨는지 찾을 수 없었고, 그 카페 사장은 어안이 벙벙해 있는 내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웃는 얼굴로 바라 보고 있었다.


스툴에 앉아서 카페 사장이 만들어준 칵테일 몇 잔에 나는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을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첫 오디션 얘기, 음악적으로 열등하다는 얘기, 외톨이가 된 것 같다는 얘기, 모든 얘기들을 하고 나니 속은 후련했다.


칵테일을 몇잔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연거푸 마시고 이제는 정말 한계가 왔을 무렵이었다.


“지수씨는 훌륭한 뮤지션이 될 거예요. 그리고 이거, 아버님이 드리라고 했어요. 시중에서는 구하기 힘들 걸거예요? 제가 사적으로 가지고 있던 겁니다. 도움이 되길 바래요. ”


“엇 헤헤, 비디오테이프네요? 너~무 고맙습니다.. 즈응말 가므사. ”


혀가 꼬부라지면서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정신줄을 놓고 쓰러져 버렸다.




1994년 3월 29일 화요일, 벚꽃 흩날리는 대우대학교 캠퍼스 교정.


‘여기가 어디지? 학교인가?’


커피 자판기 즐비한 벽 다방 밴치에서 깨어났다. 도리깨로 맞은 듯 머리가 아파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어제의 일을 더듬어 보고 있었다.


숙취 때문인지 오후 햇살이 낯설었다. 입에 심지를 물고 불을 댕기면 화염병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남겨진 게 숙취뿐이라면 허무하겠지만, 영문도 모른 체 내 손에 들려진 검은 비닐봉지. 그리고 그 안에 두 개의 비디오테이프를 놓칠세라 누군가 손목에 둘둘 감아 놓은 것 같았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가 아니라는 말이 기억났다. 집 앞 비디오 가게에서 쉽게 빌릴 수 있는 종류의 대여용은 아니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녹화용 비디오테이프.


‘어떤 영상이길래….’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나 되는 비디오테이프를 무탈하게 고이 모셔 오기 위해서는 내 아디도스 스포츠 가방에서 무거운 책을 몇 권을 빼야 했다.


컨테이너로 만들어 ‘깡통’이라 불리는 과방에 낙서장이 꽂혀있는 선반이 생각이 났다. 숙취로 어지럽기는 하지만 전공 서적을 버릴 순 없으니 거기에 가져다 둬야 했다.


입학하고서 두 번째로 가보는 과방. 과방은 학구열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허름한 소주방 같았다.


‘아니, 누가 여기 책장에 소주병을 올려놨지?’


반쯤 비우고 남아서 억지로 병뚜껑으로 닫은 소주병 옆에다가 가방에서 꺼낸 전공 서적을 대충 던져 놓았다.


소중한 전공책 대신에 비디오테이프를 챙기고 있노라니 누가 보면 일본 성인용 애니메이션이라도 보려고 저런다고 오해할까 봐.


비디오테이프가 들어있는 검은 비닐봉지를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다.




수원 학교에서 서울 낙성대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다행히도 밤 11시 30분에 겨우 집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오늘은 12시를 넘기면 나는 사형이다. 이미 외박하고 들어오는 길인데 또 12시를 넘기면 연속 이틀째 외박을 하는 셈.


다행히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모두 각자의 방에서 숙면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라? 조용하네? 휴~ 다행이다.’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2층 내방으로 숨죽여 몰래 올라갔다.


내 방, 유일한 안식처이자, 사유의 공간.


내 방에는 책장 하나, 옷장 하나, 침대 하나, 교회 형이 준 기타 한대, 그리고 오래된 전축이 있었다.


물고기 모양의 은색 스티커가 붙은 ‘세고비데’ 기타. 교회 다닐 때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친한 형이 준 기타였다. 하지만 오래되서 NECK이 휘었는지 운지판을 짚을 때마다 몇 번 치면 손끝이 금방 쓰렸기 때문에 기타 실력이 늘만큼 오래 칠수 없었다. 그리고...


돌비시스템을 지원하는 L사 파이오니어 전축. 원래는 거실에 있던 것을 최근에 내 방으로 옮겨놓느라고 힘 좀 뺐었다. 두 개의 서라운드 스피커가 달려 있어서 생동감 있는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은근 자랑하고 싶은 보물 2호. 그리고...


사실 전축보다 더 각별하게 생각하는 보물 1호는 따로 있었다.

내가 고2 때였다. 좋은 대학 가려면 TV 과외를 시청할 때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웬일로 흔쾌히 사주신 ‘비디오 일체형 TV’.


침대 맞은편 창문 맡에 놓았었기에 잠들기 바로 전까지 영화를 보다 잠들었다가 애국가가 들리면 깨서 부랴부랴 끄고 자곤 했었다.


비디오 일체형이라 ‘입’이 있었다. 그 TV 브라운관 밑에 비디어플레이어가 달린 구조. 거기에다가 VHS 비디오테이프를 구겨 집어넣으면 영상이 재생되고, 방송을 녹화할 수도 있었다.


특히 녹화기능은 이 비디오의 핵심이자 존재 이유였다. 놓치고 싶지 않은 생방송 공연 실황이나,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명화가 있다면 정말 유용한 기능이었다.


물론 토요명화나 명작극장에서 좋아하는 영화라도 한다고 하면 녹화를 즐겨 떴었는데, 아무리 타이밍을 맞춰도 그놈의 네모난 전기밥솥 선전이나, 스크류바 만화 광고가 같이 녹화되는 게 항상 불만이었다.


그래도 나름 최첨단 리모컨으로 모든 기능 조작이 가능하다는 점은 편리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때부터인가 고장이 나버려서 엄지발가락을 더 많이 쓰긴 했지만.


보물 1호라고 생각하는 비디오 일체형 TV를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에 틀게 되는 거였다. 일단 비디오나 보면서 오디션에 대한 걱정도 잊어버리고 싶었다. 잠시만이라도 ….


몸이 많이 피로했지만 가방을 열어 비디오테이프를 찾았다.


‘어떤 영상이 녹화되어 있을까?’


비디오테이플 레이블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87~1995, 라이브 공연 모음-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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