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런 바람에 - 3부. 세상을 탐하다
여행은 동기가 없어도 된다.
여행 그 자체만으로 족하다는 것이 이내 입증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여행이 당신을 만들거나 해체하는 것이다.
- 니콜라 부비에
나는 점차 여행이 여행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더는 여행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낯섦도, 두려움도 없었고, 극복의 의지도 없달까? 새로운 장소가 필요했다.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는 자연과 가깝고 현재와 먼 어느 깊숙한 곳.
Great Barrier Island, Off-the-Grid.
뉴질랜드 북단. 북섬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섬. 강화도 만한 크기에 인구는 850명 정도. 일부는 뉴질랜드 처음의 모습을 간식하고 있다고 했고, 일부는 볼 게 없다고 했다. 그리곤 별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HelpX라는 사이트를 통해 니키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의 가드닝을 도와주고 일주일 정도 숙소를 제공받기로 몇 차례 연락을 통해 확정했다.
첫날 >
아침 7시, 오클랜드 유스호스텔에서 출발하여 걷고, 배를 타고, 두 차례 차를 얻어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8시간 만에 니키의 집 근처 오두막에 도착했다. 일주일 동안 머물 곳은 울창한 숲 속에 텃밭과 오리, 닭들이 사는 가축용 우리, 온실용 돔과 간이로 만들어진 샤워실, 부엌, 그리고 두 개의 오두막이 각각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리 잡아 어우러져 있다. 핸드폰 시그널도 잡히지 않고 전기 전원도 없는 곳. 앞으로의 일주일이 기대 되는구나.
둘째 날 >
밤새 누군가의 문 긁는 소리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나가볼 용기가 나질 않아 그냥 침낭을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잤다. 뉴질랜드에는 사람들이 키우는 애완동물이랑 가축 외 동물이 거의 없는데, 뭐였을까? 주어진 부식만으로는 일주일을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아 시내에 간다는 니키 차를 얻어 타고 나왔다. 시내라고 해봤자 슈퍼 하나, 카페 둘 뿐인데 그마저도 토요일이라고 카페 하나와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걷다가 음악 소리를 듣고 간 곳은 카페가 아니라 라디오 스테이션이었다. 지붕에 태양열판 두 개가 붙어있는 작은 오두막 스테이션은 섬의 주민 커뮤니티에서 돌아가며 자원봉사 디제잉을 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그 시간의 디제이였던 토니가 반갑게 맞아주고 나의 신청곡도 틀어주었다. 60대 아주머니 디제이의 쿨함과 유쾌함, 작은 오두막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묘하게 설레었다.
셋째 날 >
아침에 잠깐 사유지 들판을 침범하여 바다에 내려갔다 왔다.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오후부터는 비가 내려 꿈적도 못 하고 책만 봤다. 한동안 진도를 못 나갔던 450페이지짜리 불타 석가모니를 훌쩍 절반 넘게 읽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끝내고 나갈 듯싶다. 이곳에선 삼시 세끼 밥을 해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 듯하다.
넷째 날 >
업무가 시작되었다. 오리 밥을 주고, 화초들 물을 주고, 창문을 닦고, 텃밭의 잡초를 뽑고, 하루 만에 부쩍 로컬의 면모를 갖춘다. 늦은 오후에 길 끝에 있는 선착장에 갔다가 우연히 성게를 봤다. 성게알 먹
을 생각에 신이 나서 바지를 걷어붙이고 물에 들어가 세 마리를 잡아왔지만, 막상 까 보니 알이 거의 없었다. 이럴 수가. 철이 아닌 건가? 집에 오는 길의 행복했던 상상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기분이었다. 며칠 동안 날이 흐려서인지 밤에 불이 나갔다. 열판이 잡아둔 태양열이 다 떨어졌나 보다. 불 켜도 깜깜한 곳인데. 막상 불이 나가니 원래 의지하던 손전등도 초라하고 쓸모없어 보였다.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에 엄청나게 많은 별이 반짝인다. 쉽게 볼 수 없는 장관이다. 신이 나서 한참을 밖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불이 있을 때는 손전등을 들고도 불 없는 방과 화장실 사이를 오가는 게 무섭단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불이 없고 보니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어둠 속 선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고 별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내일은 날이 맑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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