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방학 Part 1 - 떠남 _#8
나는 그의 메시지에 뭐라고 답할지 한참을 망설였어요.
그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질문을 던질 수도 있었고, 그저 고마움을 전하며 마무리할 수도 있었죠.
나는 서두르지 않고 신중을 기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잠시라도 곱씹어보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고민을 오래 붙들 틈은 없었어요.
다음 날부터 프로젝트에 큰 변수가 생겼거든요.
메인 액터가 터무니없는 이유로 하차를 선언한 거예요.
연출이자 촬영감독인 친구 커플은 순식간에 난감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주연 없이 다큐멘터리를 이어갈 수는 없었고, 대안을 찾으려 애썼지만 이 작은 섬에서 선택지는 거의 없었죠.
모두가 침울해졌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 할수록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듯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라는 단어가 모두의 목구멍 끝에서 맴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삼일째 되던 밤, 친구의 파트너가 럼 한 병을 들고 테라스로 나왔습니다.
"No more talk, tonight we just limin’ and drinking."
친구는 못마땅해했지만, 나는 그의 손에 들린 병을 보며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어요.
Mount Gay. 바베이도스에서 온, 가장 오래된 양조장의 럼이었죠.프로젝트가 끝나면 열려고 아껴둔 술이라는데, 그는 우리를 위해 그날을 당겨온 거예요.
얼음을 띄운 럼은 독했지만 파파야의 달큰한 향과 어울리며 묘한 끝맛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프로젝트를 망친 ‘썅년’을 욕하다가, 곧 음악을 틀고 노래를 불렀어요.
팝을 듣다 가요가 나오자, 나는 흥에 취해 음이 자꾸 삐져나와도 개의치 않고 노래를 흥얼거렸던 것 같아요.
한껏 업된 그가 깔깔 웃으며 물었죠.
“So, you like karaoke too?”
친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She knows singing isn’t really her thing, but once she drinks, she’s always like, ‘Let’s hit the coin karaoke.’”
붉어진 얼굴로 나는 맞받았습니다.
“Come on, since when do we have to be good to enjoy singing?”
잘하는 사람만 노래 불러야 하나요?
나는 술 잘 못 마시지만 좋아하고, 노래 잘 못하지만 노래방을 좋아합니다.
여행도 잘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좋아서 기회가 될 때마다 하는 거예요.
그 말들이 실제로 입 밖으로 나왔는지, 아니면 속으로만 중얼거린 건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런 이야기들이 위기에 갇혀 있던 우리를 조금은 가볍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우리는 술과 음악, 그리고 친구가 있는 밤을 그저 즐겼습니다.
그렇게 흥건히 취한 밤을 지나고, 다음 날 친구의 파트너가 내게 말했어요.
“Hey, let’s go see the leatherback turtles this weekend. You’ve been wanting to, right? I'll reserve.”
내가.. 그랬을까요?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순간 가슴이 뛰었습니다.
사실 호스트 할머니가 이야기해준 뒤 가죽등 거북을 찾아보고는,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딱딱한 등딱지가 아닌 가죽등을 가진, 세상에서 가장 크고 빠른 거북.
프로젝트의 종료를 실패의 순간이라 여겼는데, 그 자리에 다른 길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삶은 언제나 같은 현상을 다르게 보라고, 그렇게 여정을 이어가라고 속삭이는 것 같네요.
한 번 막힌 길에서 다른 기회를 찾아낸 걸 보면, 친구의 파트너는 참 어른스러운 사람이에요.
나도 언젠가 그렇게 다르게 볼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