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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는 어떠한 명분도 없다

DMZ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개막작 리뷰

by 방자

요즘 서울을 오가다 보면 광화문에서 열리는 시위를 자주 마주친다. “대통령이 중국인이다”, “짱개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 같은 구호가 울려 퍼질 때면, 듣는 내가 민망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싶다. 하지만 시위하는 이들이 사라져야 한다거나,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끝이 무엇을 남기든, 그들 역시 자신이 믿는 신념을 따라 목소리를 내는 것이니까.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요즘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여기기로 한 점이 하나 있다. 서로 다른 이념과 정치적 노선으로 이렇게나 시끄럽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상처 덕분일까, 사방의 CCTV와 오픈된 정보망 때문일까 우리는 나름의 성숙한 태도를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총과 방망이 대신 촛불과 응원봉을 든다. 물론 대통령(군통수권자)이 누구냐에 따라 여전히 달라질 수 있는 문제라는 것도 배웠지만.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투표가 중요하다는 말을 실감한다. 리더 한 사람의 선택과 권력 유지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푸틴이 러시아에서 권력을 이어가며 만들어낸 전쟁의 현실은 그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며칠 전 나는 DMZ 다큐멘터리 축제를 찾았다. 개막작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관람했고, 이튿날은 ‘다큐 로드’ 프로그램으로 제3땅굴과 도라산 전망대 등도 다녀왔다. 개막작의 원제는 〈Mr. Nobody Against Putin〉인데, 번역된 제목보다 훨씬 다큐의 본질을 잘 담고 있다고 느꼈다. 거창한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한 러시안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나는 뜻하지 않게 이 영화를 두 번 보게 되었다. 개막식 날은 함께 간 친구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끝까지 볼 수 없었고, 남은 결말이 마음에 걸려 며칠 뒤 CGV에서 처음부터 다시 봤다. 영화가 엄청 재미있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만큼의 호기심과 시간을 가진 인간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상영 후에는 감독과의 GV가 이어졌다. 몇 번의 영화제 경험 덕분일까, 첫 질문이 대화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생각에 침묵을 깨고 손을 들었다. 이어 여러 질문들이 오갔고, 나는 감독이자 주인공인 러시아인 파샤 탈란킨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쟁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파샤는 카라바시에 있는 학교의 이벤트 코디네이터이자 촬영 교사로, 어머니는 같은 학교의 사서다. 그는 일상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어떻게 학교 교육 방침을 바꾸었고, 그로 인해 아이들과 교사, 지역 사회의 관계와 신뢰, 소통의 자율성이 어떻게 흔들렸는지를 다큐에 담았다. 덴마크 감독과 외부 서포트의 도움으로 그의 기록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완성되었고, 그 과정에서 파샤라는 인물의 개인적 서사와 매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야심 있는 영화감독이라기보다, 재밌고 평화로우며 민주적으로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보통의 청년에 가깝다. GV가 끝나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본, 귀여운 지비츠 참이 달린 연분홍색 크록스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상징 같았다.


파샤가 다큐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단순하고도 명료했다. 푸틴이 TV를 통해 쏟아내고, 교사들에게 지침으로 내려보낸 온갖 선전과 달리, 전쟁에는 어떠한 명분도 없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고 삶을 파괴하는 일이다. 직접 그 안에 있지 않아도,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삶의 질은 무너질 수 있다.


그는 이제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그 결심으로 자신의 애정하던 집과 도시를 떠나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동시에 그것은 그의 새로운 모험의 시작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선택을 응원했고, 그가 그것을 기회로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크라이나는 물론이고 러시아의 시민들, 학생들, 교사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참상이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삶은 권력의 명분 아래 파괴되고 있다.


다큐에 푸틴이 “전쟁에서 군인보다 중요한 것은 교사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총을 드는 것보다 총을 쥐게 만드는 사고방식을 길러내는 교육이 더 필요하다는 맥락이었다. 전쟁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라, 문화와 교육을 통한 세대 재편의 전쟁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전쟁은 오늘의 러시아만이 아니라 미래의 러시아, 더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요즘 나는 여행 대신 영화제를 통해 문화적 간접 경험을 쌓는 데 흥미를 느끼고 있다. 이번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는 내게 새로운 관점으로 세계를 보여주는 여행이었고,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며 더 넓은 세계를 책임 있게 바라보도록 이끌어주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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