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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진 Apr 19. 2020

코로나 시대에 잘 '사는' 법 #1. 커피 프레스

농부의 마음으로 시작하는 하루

나는 마시는 사람이다. 양치를 한 다음 유산균 한 알과 물 한 컵을 들이마시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몸을 깨우는 의식이다. 하지만 정신은 커피를 마셔야지만 제자리를 찾는다. 학교에 다닐 때는 캠퍼스 카페테리아에서 아침 9시 30분까지만 주문할 수 있는 1파운드(약 1천500원) ‘얼리 버드(Early Bird)’ 커피를 즐겨마시곤 했다. 게다가 텀블러를 가져가면 0.25파운드를 깎아주기 때문에 이 소소한 즐거움을 아침잠을 이겨내는 수단으로 삼곤 했다. 안타깝게도 얼리 버드형 인간이 못 돼 간신히 시간을 맞추는 날이 잦았다. 학교 근처 정류장에서 내린 뒤 출근하는 인파 사이를 헤치며 뜀박질로 겨우 ‘제시간’에 도착한 날도 많다. 한 번은 역시나 정류장에서 카페테리아까지 힘차게 달려 9시 27분인가 28분쯤 도착했는데 (신입으로 보이는) 카운터 점원이 얼리 버드 혜택을 적용하지 않고 계산을 하려 했다. 그러자 매일 같이 나를 맞이하던 선임 바리스타가 내게 눈을 찡긋하고는 “저 친구 뛰어왔잖아. 노력에 보상을 해줘야지”라며 원래대로 0.75파운드짜리 영수증을 내민 적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기숙사에 갇힌 뒤 매일 아침 직접 커피를 끓이고 있다. 약 4주 동안 인스턴트커피 두 통을 비우고 세 통 째 접어들었을 때 간절히 원두커피를 바라게 됐다. 모든 커피는 원두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원두커피란 어불성설이겠지만, 원두와 나의 사이를 조금이라도 좁히고 싶었달까. 대량으로 원두를 볶은 뒤 얼리고, 빻고, 다시 ‘증기나 열탕을 통과시켜 추출액을 받아 다시 원심 분리기에 걸어 입자를 제거하고, 열풍 중에 건조해 만든(출처: 두산백과)’ 인스턴트커피는 편리하지만 인고와 풍파를 거친 탓인지 원두 본연의 맛과 향을 느끼기 어렵다고 하려니 너무 현학적인 것 같다. 그냥, 신선하고 구수한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연두 커피콩을 볶고, 빻고, 커피 가루가 물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짧을수록 신선한 커피가 나온다. 커피가루가 물을 만나는 방식은 몇 가지 갈래로 나뉜다. 물에 타서 넣어 끓이거나, 거름종이에 놓고 거르거나, 에스프레소 기기로 빠르게 추출하거나. 거름종이에 커피를 올린 뒤 뜨거운 물을 부어 만드는 커피가 드립 커피고, 우리가 보통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에스프레소 기기를 이용해 이 과정을 빠르게 압축시켜 만든 커피다. 이탈리아어로 에스프레소 자체가 ‘빠르다’는 뜻이다. ‘원두가루에 뜨거운 물을 고압으로 통과시켜 뽑아낸(출처: 두산백과)’ 커피가 에스프레소고 여기에 물과 우유, 시럽 등 다양한 조합을 통해 우리가 아는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등등이 만들어진다. 


어떤 방식이든 기본적으로 커피가루와 물이 만나 커피가 만들어지는데, 물과 커피가루가 가장 오래 서로를 머금어 만들어지는 커피가 내게는 으뜸이다. 게다가 신선한 커피콩을 볶고 빻고 끓여서 내는 과정이 한 자리에서 이뤄진다면 최상의 커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감사하게도 나는 이 최상의 커피를 일상에서 누릴 기회가 있었는데 회사 일로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 몇 개월 간 머물 때였다. 


커피의 고향인 에티오피아는 보통의 다른 커피 생산국—다른 아프리카 국가나 남미 등—과 달리 고유한 커피 문화가 있다. ‘분나 세레모니’라고 불리는데, 분나는 에티오피아 공용어인 암하릭어로 커피라는 뜻이다. 일단 작은 화로에 연두색 커피콩을 볶고, 절구에 빻은 뒤, 제베나라고 불리는 호리병 모양의 전통 주전자에 물과 커피 가루를 붓고 끓인다. 그다음 우리가 아는 에스프레소 잔만 한 컵에 커피를 부어 손님을 대접한다. 보통 세 잔을 마신다. 이 세레모니는 진정한 의미의 세레모니라기보다는 일상에 가깝다. 집에서도, 거리 좌판에서도, 호텔 로비에서도, 그러니까 어디를 가든 이렇게 커피를 만들어 마시기 때문이다. 끓어오를 때까지 커피가루 물을 품고, 물이 커피가루를 품어 만들어내는 커피 맛의 깊이는 남다르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커피가루를 직접 물에 끓여 만드는 커피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최근 기숙사를 떠난 세르비아 플랏 메이트가 알려준 세르비아식 커피도 에티오피아 커피와 만드는 방식이 비슷하다. 방법은 간단하다. 국자처럼 생긴 세르비아 커피 냄비? 혹은 주전자? 에 물을 끓인 다음, 질 좋은 커피가루를 넣어 조금 더 끓인다. 커피 거품이 끓어오르면 불을 끈다. 숟가락으로 먼저 거품을 떠서 컵에 담고, 그다음 커피를 붓는다. 원래 터키식 커피라는데 세르비아가 터키에 점령됐을 때부터 세르비아 커피 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면 밑에 촉촉한 커피가루가 쌓여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 컵을 뒤집어 나오는 모양으로 미래를 점치기도 한단다. 친구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 세르비아 커피 냄비(라고 일단 부르기로!)와 커피 원두를 주고 간 덕분에 몇 번 끓여마셨다. 역시나 맛이 훌륭했지만 물이 끓을 때까지 가스레인지 앞에서 기다리고 거품을 뜨고 컵에 따르고 하는 과정이 다소 귀찮아 매일의 의식으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사게 된 게 커피 프레스 기기다. 간단하게 원두품은 커피를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 기기다. 커피가루를 넣고, 따뜻한 물을 부어 커피가 물을 품고 물이 커피를 품을 충분한 시간(스타벅스 온라인 사이트의 바리스타 설명에 따르면 약 4분)을 기다린 다음 뚜껑에 달린 프레스를 눌러 가루를 가라 앉힌 뒤 컵에 따라 마시면 된다. 역시 회사 일로 르완다(에티오피아 다음 행선지였다)에 머물 당시 숙소로 삼았던 에어비앤비 호스트 로버트 덕분에 커피 프레스를 처음 알게 됐다. 한국에서도, 이곳 런던에 와서도 직접 커피를 만들 일이 많지 않아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매일 커피를 직접 만들어 마셔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다시 생각이 났다. 생각이 나자마자 아마존 쇼핑몰에서 지체 없이 주문 버튼을 눌렀다.    


커피 프레스가 도착한 지 이틀째, 이 작은 기기 하나 덕분에 이렇게 행복해질 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인스턴트커피와는 확연히 다른 커피맛 덕분이 크지만 호사를 누리는 게 비단 입뿐만은 아니다. 농부의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됐다고나 할까. 매일 아침 고운 흙처럼 부드럽고 짙은 커피가루를 한 가득 퍼서 프레스기에 담는다. 이때 고소한 커피 향 덕에 코가 먼저 즐겁다. 적정한 햇볕과 땅을 적셔줄 비를 기다리는 마음도 배운다. 전기 주전자에서 끓어오른 물이 조금 식도록 기다렸다가(끓는점인 100도씨 보다는 95도씨 정도, 혹은 그 이하에서 커피가 더 맛있게 만들어진다고 한다), 밭에 물을 주는 심정으로 작은 프레스기 위 평평히 고른 커피가루 위로 물을 붓는다. 조금만 부어 가루를 적신 뒤, 다시 물을 붓는다. 천천히 그리고 가득. 커피 향이 퍼지고, 커피크림이 떠오른다. 다시 또 4분을 기다렸다가 천천히 프레스기를 누르고, 컵에 따르면 완성이다. 컵에 바로 물을 부어 인스턴트커피를 만들 때는 몰랐던, 커피 따르는 소리로 경쾌하게 들린다. 쪼르르르. 이렇게 정성 들여 만든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며, 다시 농부의 마음을 떠올린다. 오늘 하루 농사도 잘 되게 해 주세요. 부디 성실한 시간과 노력을 쏟고, 해가 질 때쯤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며 넉넉한 마음을 수확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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