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주고 싶은 이야기 두 개
1. 광장의 여름과 겨울
지난여름, 서울에 올라온 엄마를 데리고 광화문 광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엄마 가방에 노란 리본이 달리길 바랐습니다. 엄마와 난 천천히 걸으며 광장을 둘러봤습니다. 오랜만의 방문이었지만 꼿꼿이 선 경찰, 세월호가 그려진 깃발의 나풀거림, 때가 낀 천막은 여전했습니다. 유가족들은 천막 한편에서 노란 리본을 나눠주고 계셨습니다. 전 그 앞에 서서 노란 리본을 집어 들곤, 별생각 없이 “고생 많으십니다.”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분은 웃는 얼굴로 절 보며 “어유, 이게 무슨 고생이겠어요.”라고 답했습니다. 속이 뜨끔했습니다. 뱃속에 남은 아홉 명, 기약 없는 인양을 기다리는 그분께 무던하게 건넨 인사는 어떤 의미로 느껴졌을까요. 너무 쉽게 ‘고생’을 운운한 것 같아 부끄러워 잰걸음으로 광장을 벗어났습니다.
타인의 슬픔을 가늠하긴 어렵습니다. 내가 겪어본 문제가 아니면 더 그렇습니다. 아는 체 했던 저는 처음 마주한 슬픔의 깊이에 깜짝 놀랐습니다. 엄마도 몰랐답니다. ‘세월호 보상금’, ‘종북’ 같은 카톡 찌라시가 하도 돌아다니는 탓에 유가족의 처절함을 알지 못했답니다. 엄마가 세월호 참사를 공감하기까진 2년이 걸렸던 셈입니다. 단순히 시간이 지났기에 가능했던 일은 아닙니다. 광장에서 유가족이 사라져서, 노란 리본이 그 힘을 잃었다면 엄마의 공감도 어려웠을 겁니다.
겨울이 되어선 친구들과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촛불을 들고 무리 속에 섞여 오랜 시간 걸어 다녔습니다. 자유발언대에 선 학생들의 똑똑함에 놀랐고, 질서 정연한 시민의식에 감탄했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노래는 한 해가 끝나는 지금도 입에서 맴돕니다. ‘이명박근혜’로 점철된 제 20대가 거둔 첫 승리가 될 거라 생각하니 집회 참석을 위해 광장으로 향하는 순간이 참 즐거웠습니다. 올해는 광장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게 가르침을 줬던 광장에서 새해에는 유가족과 시민의 희망을 보길 간절히 바랍니다.
2. 수업예찬
<여성과 심리> 첫 수업서 만난 교수님은 상당히 까탈스러워 보였습니다. 떠오르는 그날 기억의 전부는 ‘교수님이 뽑을 반장의 조건’입니다. 수업환경 전반을 관리할 반장의 주 업무는 책상 줄 맞추기와 상황에 맞춘 전등 조작입니다. 때문에 반장은 언제나 스위치가 있는 좌측 벽에 붙어 앉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장의 인상입니다. 교수님은 반장의 표정이 좋지 않으면 부탁하는 제 자신이 불편해지니 반장은 온화한 얼굴의 소유자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5분가량 교수님의 얘기를 듣고 나니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수업 OT에서 반장을 뽑는 자체는 흔한 일입니다만 4학년이 되도록 이처럼 상세히 반장의 조건을 열거하는 교수님을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까다로운 교수님 아래서 학점을 잘 받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첫 수업 종료 후 심각하게 수강 철회를 고민했습니다.
괴짜로 대표되던 교수님의 이미지는 시간이 지나자 ‘호불호가 분명하다’ 정도로 나아졌습니다. 교수님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단순한 선호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론을 뒷받침할 사례를 설명하는데서 그 특징이 두드러졌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관계의 자주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살던 대부분의 학생에겐 그의 태도는 참 신기한 것이었습니다. 일상서 겪어보지 못한 유형의 인간이기에 좋고 싫음을 말하는 그 모습이 처음엔 거북해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수업을 들으며 삶의 무게추를 타인에서 나에게로 조금씩 옮겨왔습니다. 교수님을 점차 이해하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나’,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와 같은 상투적 명제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만큼이나 자신의 행복에 신경 쓰는 삶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내 행복을 진정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된다면 남에게도, 나에게도 버림받을 일은 없다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