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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령 Oct 01. 2019

요가하는 해파리 14

어째 먹기 싫은데도 꼬박꼬박 잘도 먹는.

세상에는 맛도 좋고 질도 좋은 먹을거리가 참 많은데, 슬프게도 다 먹을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또 내 몸은 지나치게 솔직해서 먹는 족족 먹은 티를 확실하게 보여 주니, 살찌기 싫어서 억지로 식사 때와 양을 조절해야하고. 아침, 점심, 저녁, 삼시세끼 나 먹고 싶은 거 양껏 먹을 수 없는 신세라는 말이다. 이런 처지인데 절대 먹고 싶지도 않은 나이는 어째 꼬박꼬박 챙겨먹어지는지... 되게 세상 살맛 안 난다. 10월 완전한 가을. 뭐 한 게 있다고 벌써 곧 내년이네, 라고 한숨 푹 쉬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게 작년. 또 벌써 뭐 한 게 있다고 벌써 곧 내년이란다.


엄마랑 말다툼을 했다. 퇴근하고 돌아와 생크림 빵을 먹고 있는데 있었던 일이다. 나는 콜센터 상담원인데 하다 보니 어느덧 5년차가 되었다. 늘 하는 일이지만 하루 여덟 시간 이런저런 고객을 상대한다는 것은 아무리해도 나로서는 도무지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스트레스는 쌓이고, 당분은 땅기고, 나름 자제한다고 한다지만 그날은 어찌나 먹고 싶던지 집에 오는 길에 빵집에 들러 샀다. 큼지막한 소보로빵 사이에 담뿍한 생크림. 하얗고 몽글몽글한 생크림은 보기만 했는데도 눈이 돌아가는 줄 알았다. 보통은 저녁에는 가볍게 먹자 주의인데, 가을은 식욕의 계절이니까, 생크림 빵 하나랑 스콘 둘이랑 같이 귀가 했다. 돌아오는 길, 룰루랄라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 


  “너 남자친구 없니?”


라고 말하는 엄마는 옆에서 빨래를 개고 있었다. 듣는 순간, 나는 분명 생크림을 입안에 넣었는데 아무 맛도 안 났다. 단 맛도 쓴 맛도 그 어떤 맛도. 엄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말을 많이 하는 일을 하지만, 성품은 워낙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나랑 싸움하고 싶어도 나는 싸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만은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다른 면모가 튀어나왔다. 나이는 이만큼이나 먹었는데 가진 거 하나 없다느니, 너 주변 친구들을 보라니, 다다다 쏴대는데 듣자 듣자하니 열이 확 올랐다. 엄마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대충대충, 남 보기 좋으라고 하는 짓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내 행복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서운한 마음에 그런 철딱서니 없는 반항심마저 들었다.  


  “남의 인생이라고 막 말하지 마!”


내가 이 집에 산 지 20년 가까운데 나는 그날 처음으로 현관문을 쾅, 발로 차서 닫았다. 발로 차고 나와 그길로 요가 하러 간 것이다. 빵, 괜히 먹었다. 먹지 말고 바로 집에서 나와 요가나 하러 갈 걸 그랬다. 진짜. 나는 왜 서른이 훌쩍 넘어가지고 요 모양 요 꼴인지, 먹으면 똥으로도 안 나오는 나이가 원망스러웠다. 누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지? 그냥 콱! 현관문이 아니라 그놈 등짝을 차줘야 한다며, 분노의 요가를 한 날이 그날이었다. 후~ 하~ 후~ 하~ 들이마시고 내쉬고.


지난 주말 일해서 오늘은 평일이지만 쉬는 날이다. 나는 쉬는 날에도 평소 기상하는 대로 똑같이 하는데 일부러 습관을 들이는 까닭이다. 다른 날보다 훨씬 느긋하고 넉넉한 쉬는 날 가을 아침. 약간 찬 공기, 일어나자마자 라디오를 켜고, 창문을 열고, 이불을 개고, 카디건을 입는다. 카디건은 분홍색이고 각각의 단추 모양이 다르고 알록달록하다. 


 엄마 아빠는 직장에 이미 가고 없고, 동생들은 아직 자고 있어서 집은 매우 고요하다. 아침식사. 출근하는 날에는 삶은 계란 두 개랑 약간의 해조류가 아침식사인데 쉬는 날은 메뉴가 달라진다. 딱 정해져있지도 않고.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서 먹기로 하고 재료를 줄줄이 꺼내 요리를 한다. 

  식빵 두 장, 양파 하나, 스팸 두 조각, 계란 두 개, 올리브유, 마요네즈, 토마토케첩. 

초록색 상추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없어서, 어제 사다 둘 걸, 아쉽지만 초록색은 미역줄기를 따로 곁들여 먹는 것으로 대신하여 균형을 맞춘다. 샌드위치에 홍차, 후식으로 사과 반쪽, 하얀 요구르트를 맛있게 먹고 시계를 본다. 보니, 6시 15분에 일어났는데 아직 7시채 되지 않았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라디오 소리, 나는 식사를 빨리 하는 편이다. 고치고 싶은 습관 중 하나인데 어쩐지 막상 식사를 시작하면 먹는데 집중하느라 아예 생각도 안 난다. 


쉬는 날 아침에 하는 행위 가운데 가장 설레는 행위는 아침산책이다. 빨래까지 탈탈 털어 널고 난 다음에 나는 천원을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온다. 천원은 숲에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서 살 캔커피 값이다. 안녕하세요? 자주 애용하는 편의점의, 서로 얼굴을 아는 편의점 주인아저씨랑 아침인사를 주고받는다. 캔커피는 온장고에서 꺼냈기 때문에 따끈따끈했고 가을 공기는 밝고 상쾌했다. 오늘은, 식사 다 하고 멍 때리다가 20분정도 졸아버리는 바람에 늦게 나왔더니 숲 입구에 웬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소풍인가? 다들 얼굴이나 체격으로 봐서는 중학생정도로 보였으나 확신은 없다. 요즘 얘들은 나 어릴 때보다 성장 속도라든지 성숙 정도가 다르다고 들었다. 빠르고 나이를 모를 정도로 어른스럽다고. 초등학생일지도 모른다고 고쳐 생각한다. 좋겠다, 젊어서. 좀 부러워하면서 뒷짐 지고 숲에 들어간다. 역시나 오늘도 반가운, 우리 동네 나무들. 손에는 내가 즐겨 마시는 브랜드의, 캔커피가. 


아침 산책이 설레는 까닭은, 내가 정한 목적지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머무는 장소가 아주 멋진 까닭이다. 중간에 있는 그곳은 물이 발목까지 오고 물가 바로 앞에 나무계단이 있어서 앉아서 발을 담글 수 있다. 여기는 예전부터 잘 아는 장소인데, 20년 전만해도 물이 이렇게 얕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여기서 수영을 하고 놀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다. 저기 물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올라 몸에 튜브를 낀 채 풍덩, 물에 뛰어들었으니까 꽤 깊었는데 이제는 발목이나 담글 수 있는 정도의 깊이가 돼버렸다. 비록 상당한 물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여전히 멋진 장소다. 그리우면서도 아름다운.


  “좋다.”


물에 발을 담그고 마시는 커피는 식었지만 맛있다. 아침 식사도 맛있었고, 커피도 맛있고, 살면서 꼬박꼬박 맛있는 것만 잔뜩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맛도 없는 나이 같은 거 말고. 물속에는 조그만 물고기들이, 저쪽에는 오리 한 마리가 혼자서도 잘 논다. 요리조리 움직이는 얘들을 눈으로 좇다가, 얘들은 나이 걱정 않고 살겠지? 다음 생에 태어나면 나도 나이 걱정 않고 사는 것으로 태어나고 싶다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물고기나 오리는 좀 그렇고, 생물보다는 돌멩이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무생물이 좋겠어, 단세포 아메바 같은 거나. 물속 모래알들, 발바닥을 좌우로 움직여 비벼본다. 비비니, 모래알들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느낌이 무척이나 좋았다. 기운차고, 확실하며, 그리고 재미가 있다. 차가운 물, 오리가 그리는 동그라미 물결.


다음 쉬는 날이 언제인지, 날짜를 세어본다. 오늘 쉬고, 내일 일하고, 다음 날에는 공휴일이라 또 쉰다. 신난다. 즐거운 마음으로 숲을 내려온다. 옆길에는 나랑은 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몇몇, 이어서 아까 본 학생들이 우르르, 모두 한데 섞여서 말이다. 내일 하루만 일하면 또 쉰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면서 나도 무리에 섞여 내려온다. 나이 그까짓 거, 고민하지 말고 즐겁게 살자. 라고 생각하면서. 일단 오늘부터 살아내는 게 우선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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