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백수 Jul 11. 2019

일곱 번째 슛: 자아, 우선 한 골만 넣자!

우리 사이는 한 걸음씩 차근차근

 우리집 고양이 삼봉이는 참 희한한 고양이. 독립적인 생활을 즐긴다는 고양이들의 특성을 비웃듯 하루종일 내 반경 1미터 안을 떠나지 않는다. 아무 때나 아무 데나 만져주면 그저 좋아하는 강아지와 달리 고양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때 원하는 데를 만져주지 않으면 불만을 가진다고 들었는데, 이 녀석은 스킨십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아무 데나 만져도 내 손만 닿으면 순식간에 발라당 몸을 뒤집어 버리곤 한다. 잘 때는 반드시 내 겨드랑이를 파고들려고 하고, 내가 등을 돌리기라도 하면 내 몸을 폴짝 뛰어넘어 다시 내 반대편 겨드랑이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애교가 많다 못해 성가신 이 녀석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을 툭툭 건드리며 같이 놀자는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애교가 넘치다 못해 때론 성가시기까지 한 이 녀석도 우리 집에 온 첫 날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길고양이로 지내다가 어느 동물보호 단체에 의해 구조되었던 녀석이 임시 보호자와 함께 우리집에 처음 왔던 날, 나는 도무지 녀석의 모습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이동장 문을 열자마자 당황한 표정으로 집안을 가로질러 침대 밑으로 쏙 들어가서는 다음날까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침대 밑으로 사료그릇과 물그릇을 밀어 넣어주었지만 좀처럼 줄지 않았다. 낯선 환경에서 고양이가 보이는 일반적인 행동이라지만, 밤을 지새고 다음날 아침이 되도록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자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더 이상 그냥 둬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좋아한다는 액상형 간식을 내밀었더니 조금씩 관심을 보였지만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누워 오른손에 간식을 짜서 침대 밑에 밀어넣어두고 왼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한참을 노닥거렸다.


 이십여분 쯤 지났을까, 손바닥에 따뜻하고 까끌까끌한 고양이 혓바닥의 감촉이 느껴졌다. 삼봉이와 나의 첫 스킨십이었다. 허겁지겁 간식을 핥아먹고나서 녀석은 불현 듯 자신이 신나게 핥고 있던 것이 내 손이었음을 깨닫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코를 내 손에 부비기 시작했다. 침대 밑에서 손을 빼자 드디어 녀석이 바깥으로 기어나왔다. 그 후로 삼봉이는 내게 하루에 하나씩 허락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쓰담쓰담’을, 어떤 날은 자신의 몸을 내가 들어올리는 것을, 또 어떤 날은 귀나 발바닥을 만지는 것을 순차적으로 허락했다. 잘 때 내 겨드랑이를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좀 지난 뒤의 일이었다.


 낯가리던 고양이가 온 몸을 부비는 ‘껌딱지’가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랬던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내 품으로 뛰어든 것도 아니다. 만약 처음부터 내가 녀석을 침대에서 끌어내어 와락 안으려고 했다면 우리가 가까워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관계는 녀석이 내 손바닥을 핥던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은 내게 당연해진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의 단계가 필요했다. 지금은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내는 대학 후배 경준이와는 ‘형, 방학 잘 보내고 계세요?’라던 인터넷 메신져 쪽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안부인사를 나누다 마침 그 날 둘 다 별다른 할 일이 없었음을 알고 조금 뜬금없지만 조심스레 술 약속을 만들게 되었다. 강남 역 어느 술집에서 만나 둘이 소주를 꽤 많이 마셨던 그 날부터 그와 나는 조금씩 친해졌고, 어느 틈엔가 그는 내게 존댓말보다 욕을 더 많이 하는 웬수같은 동생이 되어있었다.


 내 노래 ‘하헌재 때문이다’의 주인공 헌재. 단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와 이토록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그와 나 사이에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고, 화해를 하기 위해 만났다가 우연히 노래방에 갔고, 의외로 그와 내가 잘 맞는 다는 것을 발견했고, 뜻밖에 서로가 비슷한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가 내게 밴드를 하자고 제안하고. 이 모든 일들이 켜켜이 쌓여 이제는 그와 내가 친구로 지낸 세월이 그 이전의 모든 세월보다 긴 시간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석조와 진짜 친구가 된 것은 이십대 중반이 되어서였다. 오랜 세월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여럿이 만날 때 얼굴이나 볼 뿐, 둘이서 연락을 주고 받거나 속 싶은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 내가 그에게 소개팅을 한 번 시켜주게 되었고, 그는 그녀와 몇 차례 더 만나며 내게 이것 저것 묻고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다. 소개팅의 결과는 결국 좋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나눴던 대화들은 뜻밖에도 우리가 친구사이로 끈끈하게 뭉치게 되는 계기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관계는 그렇게 한 걸음부터 시작하기 마련이고 차근차근 친밀해져가는 과정을 거친 뒤에야 단단해진다. 물론 첫 만남에 서로에게 흠뻑 빠져 둘도 없는 친구, 혹은 연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술에 취했건 연애감정에 취했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에서나 발생하는 일이고, 그렇게 친구나 연인의 관계가 정립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또다시 한발 한발 가까워져가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가끔 그런 과정을 생략한 채 처음부터 깊은 관계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서로의 삶에서 서로가 소중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 말이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말을 편하게 하자고 한다든가, 첫 만남에 갑자기 너무 깊은 이야기를 꺼낸다거나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비밀을 들려준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럴 때는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관계에 있어서 한 발자국 물러서게 되는데, 그럴수록 더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는 것이 그런 사람들의 속성이다. 나는 점점 물러서고 그들은 더욱 우악스럽게 다가오는 일이 반복되다보면 그들은 대개 나가떨어지고 만다. 때로는 나에게는 야박한 놈이라는 비난을 남긴 채. 


슬램덩크 완전판 3권, 이노우에 다케히코, 대원


 능남과의 연습경기가 시작되자마자 19-0으로 몰리고 만 북산. 이 때 팀의 매니저 한나와 부주장 준호가 외친다. “자아, 우선 한 골만 넣자! 침착하게 한 골씩 넣는거야!” 비록 경기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북산이 능남을 턱밑까지 추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외침에서부터였다. 북산은 곧바로 터진 채치수의 덩크슛을 시작으로 한 골씩 차근차근 넣어가며 점수차를 서서히 좁혔다. 팀의 주장인 채치수가 북산의 뜨거운 열정으로 팀을 이끈다면, 한나와 준호는 언제나 팀원들을 부드럽게 다독여가며 침착하게 한발씩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이 있기에 북산은 이기고, 지더라도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렇다. 채치수의 열정도 필요하지만, 침착하게 첫 번째 계기를 만들고 한발 한발 나아가는 과정 없이는 누군가의 인생에 감히 뛰어들 수 없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섯 번째 슛: 자네는 비밀무기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