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여기는 러시아 모스크바
"저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습니다"
이 말이 이렇게 답답하게 다가올 줄 몰랐다.
보름 전만 해도 따뜻해지는 모스크바 날씨를 창밖으로 내다보며 '이제 봄이구나, 모스크바는 봄이 정말 예쁘다던데' 설렜었던 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근방에 병력을 배치했다는 둥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종종 나오긴 했지만 러시아 내부에서는 모두 설마 하는 분위기였다.
몇 안 되는 러시아 현지 지인이나 남편의 회사 직원들도 '그런 무모한 짓을 굳이 왜 하겠어?'라고들 했다.
그런데 무모한 짓을 굳이 하고 있는 거다. 이 나라의 대통령이.
그 무모함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건, 역시나 평범한 우리들이다.
루블 가치가 폭락하면서 물가가 너무 올랐다.
러시아는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인데, 신선채소나 과일, 기저귀 같은 아기 용품들은 거의 유럽 주변 국가에서 들여오는 것 같다.
전쟁이 시작된 후, 나를 가장 뜨악하게 하는 건 기저귀 값.
일본 기저귀를 쓰고 있는데, 경제 제재가 발표된 후 반나절 만에 64개들이 기저귀 팩 값이 500 루블(7000원 정도)이 올랐다.
심상치 않다 싶어서 두 달치 정도를 얼른 사뒀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날, 기저귀 값이 기존 가격의 2배가 됐다.
두 달만에 상황이 나아질 리가 없는데... 그럼 난 기저귀 하나에 1000원 가까이 써야 한다.
'똥은 한 번에 몰아 싸주면 안 될까?'
요즘 부쩍 많이 먹고 많이 싸는 아기에게 대변을 한 번에 크고 굵게 싸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내가 어이없다.
'웃프다' 이보다 더 적확한 용례가 없을 거다.
채소, 과일 값도 조금씩 오르고 있다.
'조금씩' 오르는 건, 러시아 정부에서 식품과 생필품의 경우 최대 5%까지만 가격을 올리도록 제한했기 때문.
하지만 이 조치가 언제까지 유효할지 모르겠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인의 불금 저녁 밥상에 없어선 안될 상추는 조만간 구경하기 힘들어질 것 같다. 잎채소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 대부분 건너오니까.
이쯤 쓰고 보니, 갑자기 민망해진다. 우크라이나에서 하루에 수백 명이 죽거나 다치고, 수십만 명이 피난을 가고 있는데, 나는 기저귀와 상추 타령이라니.
얼마 전, 원래 일해주던 베이비시터가 갑자기 그만두게 돼서 새로운 베이비시터 후보들을 면접 봤었다. 우크라이나 국적이 참 많았더랬다.
그중 30대 중반에 아이 둘의 엄마인 우크라이나 사람과 합이 꽤 잘 맞아서 일해달라고 했었는데,
고향에 잠깐 다녀올 일이 생겼다며 내 제안을 고사했더랬다.
3월 말에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다고 했는데.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부디 무사하기를' 밖에는
모두들 전쟁이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총소리가 멈춰도 우크라이나는 물론, 침략국인 이곳 러시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계속 전시 상태일 거다.
한 사람의 이기적이고 비이성적인 결정 때문에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간 마트에서, 주말에 아이와 함께 간 쇼핑몰에서, 하물며 육퇴 후 켠 TV에서도.
여전히 남아있을 전쟁의 상처를 이곳 러시아 사람들은 오래오래 견뎌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부끄럽게도,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앞으로 감내해야 할 고통은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