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되돌아보는 2005년 여행
10월 6일 목요일, 뉴욕에서 3일째.
아침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호텔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어제 사둔 빵과 햄, 치즈, 우유 등으로 이틀 아침을 해결할 수 있으니 좋았다. 오늘은 미드타운으로 가서 센트럴 팍 웨스트에 있는 피어에서 배를 타고 맨해튼 중남부를 중심으로 일주하는 일정이 가장 먼저 잡혀있다. 만약 시티패스를 먼저 구입하지 않았다면 일정이 어떻게 됐을까? 나름대로 전혀 다른 일정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어떤 게 나았을까. 다음 여행 때는 시티패스를 구입하는 것이 좋으냐 아니냐를 놓고 잠시 생각에 빠진다.
지하철을 이용해 다시 타임스퀘어로 나왔다. 그러고 보면 뉴욕의 지하철은 참 지저분하다. 오래돼서 역이 무척 낡았고, 냉방이 안돼서 찜통더위다. 전동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백인 여자가 지나가며 "it's really hot here" 하며 인상을 쓰며 지나간다. 그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 듯하다. 거리에서 보게 되는 인구에 비해 지하철에는 백인들이 별로 없다. 백인들의 소득이 상대적으로 높고, 그래서 이들은 지하철보다는 승용차나 택시를 많이 이용하는 건지, 아님 맨해튼 내에서만 사는지.
타임스퀘어에서 피어 쪽으로 가는 버스 타는 곳을 찾으려고 잠시 왔다 갔다 한 후 모퉁이에 손수건 만한 표지판에 M+번호가 적힌 것을 발견했다. 여기가 바로 정류장이다. 버스를 탄지 10분도 안돼 피어에 도착했다. 역시 맨해튼의 좌우는 좁다. 시간표를 보니 하루에 두 차례 배가 있는데 11시에 있다. 30분 전이다. 시간을 체크해보지 않고 왔는데도 시간이 맞았다
기다리고 있는데 1~2학년 아이들이 소풍을 가는 건지 아이들 한 50여 명과 학부모, 선생님들이 배를 타려고 온다. 재잘재잘 거리는 아이들을 가만히 보니 머리가 노랗고 피부는 하얀 백인 일색이다. 온갖 인종이 섞인 뉴욕인데도 한 집단에는 동류만 모이는 법인가. 이 아이들은 백인 거주지역의 사립학교 아이들인 것 같다. 미국이 멜팅팟이라고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함께 살면서도 다른 인종과는 잘 섞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문화가 다르고, 생활수준이 다르니.... 조잘거리는 아이들이 배 맨뒤로 자리 잡는 것을 보고, 우리는 배 맨 앞쪽으로 갔다. 배가 크니 아이들 조잘거리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잠시 후 30대 후반 또는 40대 정도 보이는 선박 가이드가 와서 마이크를 잡고 배가 지나는 좌우를 설명해준다. 뉴욕에서 태어나 자란 뉴요커로서 우리들을 환영한다고 말한 뒤, 좌우로 펼쳐진 배 밖으로 뉴욕과 뉴저지의 건물들을 설명한다. 저런 직업은 좀 더 나이 든 뉴요커가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좌우를 감상한다. 배는 뉴욕 미드타운 서쪽 항구에서 출발해 맨해튼 아래쪽으로 가서 자유의 여신상을 지난 후 맨해튼 동쪽 미드타운쯤에서 돌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도는 2시간 코스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맨해튼 다운타운의 높은 건물들... 맨해튼이 좁으니 저렇게 높은 건물들이 들어설 수밖에 없었을까. 왜 퀸스나 롱 아일랜드, 브롱스 쪽으로 더 번져나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으로 맨해튼의 마천루를 바라본다.
배에서 내린 후 바로 근방의 육해공군 박물관에 들렀다가 타임스퀘어 근방으로 다시 왔다. 거기서 샐러드 바에서 샐러드와 피자 등으로 점심을 먹었다. 뉴욕 여행 3일 만에 고객이 스스로 고르는 샐러드 바가 좋아진다. 하지만 아직도 어떻게 골라야 할지 잘 모른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우선 시금치나 상추 등을 고르고, 새먼이나 치킨 가슴살, 두부 등 메인을 고른 후, 치즈나 토마토, 브로콜리, 빈 스프라우트 등을 고르고, 토핑을 추가한 후, 드레싱을 고르는 것이 순서이다. 그것을 모른 채 이것저것 뒤죽박죽 고르려니 종업원 눈치가 심상치 않다. 하긴 여기는 하와이처럼 친절한 구석이 없는 곳이니 순서대로 골라도 친절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점심 후에는 센트럴 팍 동쪽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에 갔는데, 그날이 쉬는 날이란다. 이런이런, 일정표에 쉬는 날을 피해서 써놓은 것으로 알았는데 실수가 있었다. 건너편 센트럴 팍에 잠시 들른 후, 그럼 어디로 갈까.... 아래쪽으로 내려가기로 하고 다시 지하철을 탔다. 내린 곳은 차이나타운. 어제 다리가 아파서 걷는 걸 포기한 자리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좀 걸어서 올라가면 소호, 뉴욕대학이 나온다. 주위를 살피며 걷는데 세라가 또 다리 아프다고 뒤처진다. 또 오래는 못 걷겠군. 하긴 나도 다리가 아픈데 9살 세라는 오죽하랴. 소호에서 몇몇 가게를 들러봤는데 옷값이 꽤 비싸다, 블루밍데일 소호점에서는 티셔츠 하나가 백 불을 훌쩍 넘는다. 뉴욕대학 (NYU) 앞에 온 것 같은데 캠퍼스가 보이지 않고 덜렁 건물만 있다. 학생들이 여기저기 있는 걸로 봐서 학교가 분명한데 캠퍼스가 없다. 아니 뉴욕대학이 하와이 퍼시픽 대학처럼 도심에 건물만 덜렁있는 그런 학교였단 말인가? 세라의 발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학교 근처 한 카페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B 바 앤 그릴 정원에서 스테이크와 맥주로 저녁을 먹고 호텔로 향했다.
뉴욕대학(NYU)에는 따로 캠퍼스가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대학이라면 당연히 교문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캠퍼스가 있는 것으로만 알았었다. 하와이에 처음 왔을 때도 하와이퍼시픽대학 (HPU)이 캠퍼스가 따로 없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었다. 하와이퍼시픽대학은 팔 리 쪽에 캠퍼스가 있긴 하지만 그쪽에는 일부 학과와 기숙사로 주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은 호놀룰루 다운타운에서 알로하 타워로 이사하면서 그 일대를 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캠퍼스 분위기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전만 해도 다운타운의 여기저기에 강의실이 흩어져 있었다. 보스턴대학 (Boston University)도 학교 전체를 포괄하는 캠퍼스가 따로 없기는 마찬가지다. 커먼웰스 애비뉴를 따라 길게 여러 곳에 건물들이 산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캠퍼스가 있고 없고는 미국 대학에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대학의 캠퍼스뿐만이 아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왜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15년 전 맨해튼에서 NYU 정문을 열심히 찾아 헤매던 내 모습이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