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되돌아보는 2005년 여행
10월 5일 수요일
뉴욕 여행 둘째 날, 일정표에 따르면 자유의 여신상과 다운타운 쪽으로 가는 날이다. 아침을 어제저녁에 사둔 재료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우유 한 잔과 함께 간단히 때우고 일찌감치 호텔을 나섰다. 일찍 이래 봐야 9시가 다 됐지만. 이제는 지하철 노선이 좀 익숙해져 마음도 편하다. 맨해튼으로 건너자마자 다운타운 쪽으로 내려가는 지하철로 갈아타고 보울링 그린에서 내렸다. 이 노선은 할렘 쪽에서 내려오는 것이라 그런지 흑인들이 많이 타고 있다.
지상으로 나와 둘러보니 빌딩 숲이 사방을 가리고 있었다. 아메리칸 인디언 박물관이 우람하게 서있는 옆길을 통과해 보울링 그린(미니 공원처럼 꾸며놓은 곳)을 지나 배 타는 곳으로 갔다. 이 곳에서는 자유의 여신상과 엘리스 아일랜드(유럽인들이 이민 올 때 처음 도착해 검역받고 이민 절차를 위해 대기하던 곳)로 향하는 배들이 출발한다. 거리에 자유의 여신상처럼 치장을 하고 관광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우습고, 그런 그들과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도 재미있다.
자유의 여신상으로 가는 배는 한 4~5백 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3층으로 되어 있다. 일찍 승선해 3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에 탄 사람들은 대부분이 백인들. 뉴욕 어디서나 그렀듯 역시 아시안은 뉴욕에서는 소수계임이 분명하다. 앞에 앉은 백인 가족이 먹는 빨간 사과가 탐스럽다. 나중에 배에서 내리면 저 사과를 사 먹어야지. 배는 한 10~ 15분여 만에 자유의 여신상에 도착했다. 자유의 여신상에 가려는 사람들은 여기서 내리고, 엘리스 아일랜드에 가려면 그냥 타고 있으면 된다. 우리는 내렸다.
자유의 여신상은 높긴 하지만 여신상을 모셔놓은(?) 땅은 생각보다 좁다. 자유의 여신상 유명세에 비추어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어놓을 수도 있을 텐데, 여신상이 서있는 땅이 좁아서 제대로 갖추어놓지 못한 형편인 듯하다. 자유의 여신상에 올라가지는 않고, 그 옆에 앉아서 소피와 나는 매점에서 사 온 커피를 나누어 마셨고 (스타벅스 커피 로고를 붙여놨는데, 맛이 스타박스의 그 특유한 진한 맛이 아니다. 세라에게는 M&M 초콜릿을 사줬다. 세라도 몇 년 있으면 커피를 마시려 하겠지. 그때가 되면 스타벅스도 오래된 구식 브랜드가 되어 있겠지만.
다시 선착장으로 나가서 엘리스 아일랜드로 가는 배를 탔다. 거리는 5분 정도, 건물이 고풍스럽다. 중앙홀에는 당시 유럽에서 온 사람들의 이민가방들이 쌓여있고, 언제 어디서 얼마만큼 사람들이 왔는지 다양한 표와 전시물들이 있다. 아시안으로서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지만, 조상이 유럽인 백인들은 이곳에 온 감회가 우리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아 ~우리 고조할아버지, 할머니가 이곳을 통해서 미국에 오셨구나... 하는 생각.
여기저기 둘러보다 이민역사에 관해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극장에 들어갔다. 30분 길이의 영화가 곧 상영된다고 한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기다리는 사이 세라는 꼬박꼬박 존다. 이런이런, 세라의 교육을 위해 들아왔는데 학생은 잠만 잔다. 그 옆에 앉은 소피도 졸고 있다. 아이구, 나라도 제대로 봐야지.
엘리스 아일랜드를 떠나 다시 맨해튼 보울링 그린으로 돌아왔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그린위치 빌리지까지 가기로 되어있다. 서서히 걸어가는데 금방 월스트릿을 상징하는 황소가 길거리에 보인다. 계속해서 증권거래소와 성당, 무역센터가 있던 그라운드 제로까지 갔다. 철책이 둘러져진 그라운드 제로에는 뻥 뚫린 공간을 중심으로 철책 담에 무역센터의 공사 사진에서부터 9.11 당시의 사진까지 전시돼 있다. 많은 사람들이 테러의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다시 월스트릿으로 돌아와 '여기가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지란 말이야?" 하는 눈으로 거리를 둘러본 후 인근 카페에서 점심을 먹었다. 샐러드 바에서는 샐러드를 손님이 직접 담아서 무게 단위로 값을 치르도록 되어 있다. 캐쉬어는 유학생 인듯한 한국 남학생이었다.
시청 쪽으로 행해 계속 걸었다. 세라가 발 아프다고 투정을 하지만 어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신발에 롤러가 달려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집에 있는 스쿠터를 가지고 올걸 그랬나 하는 생각까지 난다. 세라는 슬리퍼가 있으면 더 낫겠다고 해서, 호텔에 놔두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슬리퍼를 하나 더 사려고 페이레스 등을 뒤져봤지만 슬리퍼를 팔지 않는다. 차이나 타운에서 슬리퍼를 샀지만 얼마 후 발 아픈 것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 이상 걷는 걸 포기하고 타임스퀘어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타임스퀘어로 간 이유는 적당한 뮤지컬을 하나 보려 했기 때문인데, 사람들에 떼밀려 찾아간 TKET 매표소와, 하나 골라서 간 맘마미아 상영관은 상연 시작시간에 맞춰 몰려든 입장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가격도 최소한 한 명당 60불이니 180불. 관람을 포기하고 대신 편안한 곳에서 타임스퀘어 야경이나 관람할 요량으로 메리엇 호텔 라운지 더 뷰(48층 이던가?)에 들어갔다.
더 뷰를 위해서 특별히 만들었다는 레드와인 한 병을 시키고, 세라는 샐러드 뷔페를 신청했다. 세라는 별로 먹지도 않고 좀 느끼했던지 먹지 않겠단다. 하긴 치즈와 샐러드 정도에 불과하니 뭐 먹을 것도 없다. 뷔페를 시킨 사람과 안 시킨 사람이 나누어먹지 말라는 메뉴의 문구 한 줄 때문에, 고민하던 소피와 나는 세라가 가져다준 치즈 조각 한 두 개의 맛을 그것도 살짝 보는데 그친다. 그렇게 먹으니 더 맛있는 건 왜일까? 먹은 것 없이 100불이 훌쩍 나왔다. 하긴 와인 한 병을 타임스퀘어 야경 감상하며 먹으려면 그 정도는 내야겠지. 처음엔 몰랐는데 더 뷰가 최상층이고 이 라운지가 서서히 돌아가고 있었다. 한 바퀴쯤 돌아 제자리로 왔을 때는 약 1시간 15분 정도 걸렸고, 그때 밖으로 나왔다. 건너편 맥도널드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로 후식을 한 뒤 호텔로 가는 지하철에 올랐다.
미국의 다른 도시를 여행하다 스타벅스를 만나면 반갑다. 커피를 좋아했던 내가 자주 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르는 도시에 가서 내가 잘 아는 공간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슈퍼마켓도 체인으로 되어 있는 브랜드가 많아서 비슷할 듯 하지만 막상 본토 여행을 다녀보면 하와이에서 보던 브랜드를 쉽사리 만나기는 어렵다. 여행 중에도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진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있자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기침이 많이 나서 커피를 끊은 이후에는 스타벅스에 전처럼 많이 가지는 않는다. 그래도 잠시 앉아서 쉴만한 곳으로는 스타벅스가 가장 적당하기 때문에 가끔 가기도 한다. 지금은 커피 대신 차를 마신다. 하지만 커피 향기는 아직도 참 좋다. 유럽에서는 스타벅스를 찾기가 쉽지 않다. 영국에는 그나마 많은 편이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스타벅스가 기를 펴지 못하는 모양이다. Globalization으로 무장한 스타벅스가 유럽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Localization 이 아닐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