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하자. 일단 쓰자.

나의 글쓰기 방법

by 수필버거

이른 저녁을 먹은 지난 주 어느 날, 늦은 밤에 배가 출출해서 사과를 먹으며 채널 서핑을 하다가 드라마 미생 정주행 특집을 만났다. 에피소드 16을 하고 있었다. 방영 당시 반응이 뜨거웠던 작품이다. 너도 미생, 나도 미생, 우리 모두 미생. 아직 살지 못한 ‘수’를 뜻하는 바둑 용어를 온 국민이 알게 했던 드라마. 나도 정주행으로 다 봤고 만화 전집까지 갖고 있어서 내용은 안다. 그런데도 채널을 돌리지 못하고 홀린 듯 내리 두 편을 보고 잤다. 한여름 자전거 라이딩을 하고 냉수를 마신 것 같았다. 미생은 따뜻할지언정 속 시원한 사이다 드라마는 아닌데도.


추석 연휴 첫날 사무실에 나갔다. 하려던 일은 뒤로 미루고 아침부터 미생 드라마 18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연달아 세 편을 봤다. 드라마는 끝이 났는데, 나는 계속 목이 말랐다.

아, 맞다. 2부도 있었지. 다음 웹툰(현 카카오 웹툰)에서 일주일에 한 편씩 연재하던 미생 파트 2를 감질나게 기다리는 게 싫어서 보다 말았던 기억이 났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미생 전질은 총 아홉 권이다. 아직 연재 중인지 완결인지 궁금해서 검색을 했다. 미결이고 만화책으로 2부가 나와있단다. 10에서 14편까지 다섯 권.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여전히 ' 비 컨티뉴드'이다. 카카오 웹툰에 아직 연재 중인 미생 파트 2는 95화부터 9월 4일 자 144화까지 올라와 있었다. 모두 무료였다. 별일이네. 인기가 떨어졌나?

아무튼. 드라마 세 편, 만화책 5권, 웹툰까지 다 보는데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걸렸다. 시간 낭비였을까? 아니면 내 필요라는 안테나에 걸린 그 무엇이었을까?




한 달에 한두 개 글을 쓸 때는 얼추 구상을 하고 쓰기 시작했다. 재즈 클럽에서 아직 조금 설익은듯한 젊은 뮤지션의 연주를 들으며 든 '지치지 않고 오래 한다는 것'에 관한 단상은 집으로 오는 길에 대충이나마 머릿속에서 꼴을 갖췄고 그대로 쓰면 됐다. 모터사이클로 유라시아 횡단기를 쓴 손현 작가의 책이 내 가슴을 뛰게 했다는 얘기는 일기 쓰듯 썼다. 마감도 없고, 길이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됐고, 앞뒷 글과 연결성은 더더욱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됐다. 크게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었다. 마음에 안드는 글은 지웠다. 전체 흐름이란 게 없으니까. 그저 내가 글 한 편 썼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글로 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원고지 600매 쓰기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다섯 번째 챕터를 쓰면서는 까닭 모르게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글 발행 속도가 뚝 떨어졌다. 쓰다 보면 이거 어느 글엔가 썼던 얘기 아닌가 싶어 앞서 쓴 글들을 찾아 읽으며 확인도 해야 해서 속도가 더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찾은 방법이 해당 주제에 대해 떠오르는 모든 얘깃거리를 일단 다 쏟아붓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기승전결을 짜고 글을 쓰는 게 되지 않아서 찾은 고육지책이다. 중언부언이라도 일단 생각나는 것은 모두 구글 독스에 쓴다.(요즘은 메모장 대신 구들 독스를 쓴다)

퇴고할 때 확인할 건 하고, 버릴 건 버리고, 고칠 건 고치는 것으로 방법을 바꿨다. 종종 버릴 게 너무 많아서 새로 써야 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그래도 주제에 대해 끌려 나올 수 있는 모든 소재를 꺼내놓고 보면 맥락을 찾고 정리를 하기가 조금 쉬웠다. 불필요한 내용, 연관성이 떨어지는 내용, 과한 자기 노출의 내용을 걷어내면 ‘지금 이 순간’ 최선인 단촐한 글이 남았다.




사람은 원래 보고 싶은 걸 보고 믿고 싶은 걸 믿는다. 2014년 미생을 볼 땐 ‘자리’에 대한 이야기로 봤었다. 장그래의 자리. 오 과장의 자리. 안영이가, 장백기가, 한석률이, 김동식이 완생으로 필 수 있는 내 자리를 찾고 만드는. 주관적 관점이다. 당시의 내 자리를 지키기가 위태로웠던 상황이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미생 1부의 무대는 대기업이었고 2부는 중소기업이 배경이다. 그래서일까, 이번엔 '일의 기본'이라는 관점으로 봤다. 재벌회사의 막강한 인프라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야 하는 중소기업 구성원들의 이야기로 읽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에겐 대기업에서 쌓은 경험과 인맥이 있다는 것. 그 경험과 인맥을 총동원해야 생존을 위한 작은 일감이라도 딸 수 있다. 몸에 기억으로 새겨진 것들모조리 꺼내서 정리하고 추려서 하나씩 일을 만들어 간다.


지난달에 허술하나마 포장 장비까지는 만들었다. 예전의 나는, 이 정도 준비면 탱크로 변했었다. 이런 생각과 저런 아이디어를 떠올린 내가 기특했다. 머리로 그림을 그리면 일필휘지로 글 한 편 뚝딱 쓰듯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기대에 부풀어 막무가내로 일단 돌진하고도 남았을 텐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아 꼼짝할 수가 없었다. 포장기 테스트를 마치고 고작 이틀 행복했다. 진격도 후퇴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추석을 맞았다. 마음이 흔쾌해야 다음 단계로 나갈 텐데 뭔가가 나를 쭈뼛거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또다시 겪게 될지도 모를 실패에 대한 공포인가? 타당한 의심이다. 이번 신상품 출시는, 내 딴에는 제법 많은 것을 걸어야 하고 실패의 위험도 안아야 한다. 연관 업체들, 거래처 설득도 해야 한다. 기존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어려운 일이 될 터이다. 된다는 보장은 당연히 없다. 안될 확률을 최대한 낮추는, 될 확률을 최대한 높이는 게 최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내 계획일 뿐이다. 쏟아부었다가 잘 안되면 타격이 클 것이 자명하다. 코로나로 시간 까먹은 것도 억울한데 잘 안돼서 자원까지 깎아먹으면… 많이 힘들어질 게다. 그 두려움이 내 발목을 잡는 건가.




좁게 희망만 바라보는 것도 바보지만, 올지 말지 모를 절망 과장하고 주저하는 것도 천치다. 일은 일로만 생각하자. 미생을 보는 내내 드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오 과장은 말한다. 일을 하자고, 쓸데없는 생각 얹지 말고 그 시간에 일에만 집중하자고.

장그래도 말한다. 일을 '계속' 하고 싶다고, 일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추석 다음 날 출근을 했다. 짬짬이 만들어 컴퓨터에 보관했던 서류들을 하나하나 열어서 다 프린트했다. 투명 폴더 한 개가 가득 찬다.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폈다. 더 필요한 자료는 없어 보인다. 오래 준비한 자료들이다. 희망도 아니고 절망도 아닌, 명료한 숫자로 된 팩트들. 지도처럼 간단한 요약본으로 압축했다. 최대한 단어로만 정리했다. 달랑 노란색 A4 리갈 패드 한 장이다.

계산 과정은 생략했고, 만들며 숙지한 상세 전략 내용도 제목만 남겼다. 버리고 걷어내니, 틀이 짜였다. 이게 참, 이렇게 간단하게 보이는 한 장을 만드는 게 말과 생각만으로 되지 않았다. 오래 생각하고, 자료를 모으고, 경험에서 꺼낼 것을 찾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긴 시간 끝에 만든 서류다. 다 쏟아부었다. 내 경험과 인맥(데이터를 구해야 해서)을 총동원했다. 그래서 남은 것이 노란 종이 한 장이다.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제 도움되지 않는 감정만 걷어내면 될 것 같다.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600매 쓰기는 이제 400매 겨우 넘겼고 응모 마감은 다음 달이다. 처음 계획대로 3권의 브런치 북은 못 내겠지만, 그래도 지금 쓰고 있는 매거진 두 권은 내보고 싶다. 마음은 급한데 진도는 처졌다. 답답하다. 해내지 못하면 어쩌나. 상은 바라지도 않지만 계획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 불안하고 불편하다. 마음만 출렁출렁.


빨리 출시를 하고, 성공하고 싶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어쩌고 할 시간이 없다. 경제적인 상황도 얼른 예전 실패 전으로 되돌리고 싶다. 더 준비할 건 없을까, 더 살펴야 하지 않을까, 놓친 건 없을까, 이번 일을 망치면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렵다. 아직 9월이고 벌써 9월이다. 오늘 새벽은 추웠다.

어떤 일이건 속도에 빠지면 안 된다. 가속이 붙은 사고에 내 생각을 맡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의 판단이 아닌 가속의 결과일 뿐이다. 문득문득 멈춰야 한다. 스스로 생각을 재고하는 것이야말로 정확한 판단의 기초인 것이다. -<미생 / 윤태호 저> 중에서


흐트러진 서류를 간추려 플라스틱 파일에 다시 담았다. 더 보탤 것은 없었다. 타임 라인에 맞춰 해야 할 일, 필요한 자원을 배치했다. 폰트를 줄여 엑셀 한 장이 됐다. 오늘은 연휴 마지막 날이다. 시간 낭비를 했을까?

쏟아내듯 쓴 글을 다시 읽으며 문단 네 개를 버렸고 인용문 한 개를 추가했다. 순서는 크게 손 댈 게 없다. 이제 결론만 쓰면 된다. 이 글은 챕터 5의 여덟 번째 글이 된다.


일이 느리게 진행되더라도, 또 무수한 수정을 해야 하더라도, 이 글이 읽는 분들 눈에 차지 않더라도, 지금의 나로선 이것이 최선이다.


될 일은 된다. 충분히 준비했다. 두려움이 무슨 도움이 될까. 감추고 집중하자. 아니, 일단 하자.

읽을 사람은 읽는다. 나의 누추하고 헤매는 글도 어떤 한 사람에겐 필요할지도 모른다. 일단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