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동안 모아둔 자료를 바탕으로 사업계획안을 만들었다. 여러 날이 걸렸고, 마지막에 들어가는 추정 재무제표를 만드느라 또 며칠이 추가됐다. 지난 주말에 여섯 번째 수정본을 저장했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데도 놓친 건 없는지, 빠진 내용은 없는지 하는 걱정에 틈만 나면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이 문서는 내부용이다. 더 정확히는 나와 아내만 보게 될 문서다. 외부 업체에는 계획안을 발췌 요약 첨삭한 맞춤 제안서를 별도로 만들어 제출할 것이다.
아내에게 보여주는 이유는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다. 오래전, 혼자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끙끙거리다가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터진 후의 최악의 결과만 알렸었다. 사업이 엎어졌을 때 그랬다. 부끄러워서라기 보다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결과적으로는 더 큰 걱정을 끼치고 말았다. 곤궁해지고 나서의 궁상맞은 삶은 온 가족이 감당해야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가만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그일 이후로는 회사의 중요한 변화는 아내의 동의를 구하고 진행한다. 비판적인 시각, 객관적인 시각으로 검증받겠다는 뜻도 있다.
더 이상의 수정은 치장이지 않을까 싶었다. 초안보다 많이 짧아졌다. 편지를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써 보낸다는,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도 있잖은가. 짧아진 건 핵심만 남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출력하니 9장(표와 사진 자료가 많아서)인데 문장과 내용이 처음보다 꽤 명료해졌다. 고쳐 쓰며 하도 읽어서 이젠 달달 외울 정도가 됐다.
다짐만 있고 확신은 없던 새해 벽두부터 가을에 접어든 지금까지 한 일을 생각하면 새로 회사를 차린 기분이 든다. 리빌딩이라고 해야 할까. 내속은 치열했는데, 밖에서 누가 나를 봤다면 한가로워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밤을 새워 공장을 돌린 것도 아니고, 연일 출장과 회의에 시달린 것도 아니다. 흔히 떠올리는 '열심히 일하는' 장면은 별로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지쳤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건 염려(念慮)가 깊었던 탓일 게다. 정민 교수는 칼럼(세신 설어)에서 생각을 상(想), 사(思), 고(考), 념(念), 려(慮) 다섯 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그중에서 '념(念)'은 맴돌아 떠나지 않는 생각, '려(慮)'는 호랑이가 올라탄 듯 짓누르는 생각이라고 했다. 내가 지친 건 염려에 깔려 허우적거리느라 진이 빠진 것이다. 세 계절 내내 폐업이란 무거운 단어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변화 없이 이대로 가다가는 서서히 말라죽을 것 같은 무서운 걱정에 눌려 살았다.
공들여 쓴 계획서를 여러 번 다시 읽고 고치며, 염은 자신감으로 려는 확신으로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꼈다. 지난 여덟 달 동안 수익구조 개선도 했고, 몇 년을 끌던 장비 개발도 일단락 지었다. 요약하니 간단한 일처럼 보인다. 간신히 해냈는데도.
올해는 이것을 해냈다고 할 만한 일은 두 가지뿐이다.
몸이 고되지 않았다고,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놀멘 놀멘 지냈던가? 아니다. 계속 일을 했다. 새벽에 앞산을 오르는 것도 일이었고, 밥을 먹는 것도 일이었다. 술자리 한담을 하다가도 메모를 했고, 운전을 하다가도 무릎을 치는 생각을 짜냈다. 일을 했다. 계속, 매일.
“제 친구는 창작하는 일을 하는데요, 제가 볼 땐 친구가 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자나 깨나 일 생각만 하는데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자기가 아무것도 안 했다고 생각해요. 그냥 게으르고 놀기만 한다고요. 한 달로 치면 28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3일 동안만 했다고 자기가 너무 게으르다는 거예요. 저는 그 시간도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친구를 보며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28일 동안 안 쓴 거 맞잖아…? 남들은 매일 쓰는데 안 한 거 맞잖아… 그리고 서점 사장님이 말했다.
“창작은 전부 아니면 전무라고 하잖아요.(처음 듣는 말이었다.) 물이 끓어서 기체가 되는 것처럼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은 창작물은 아무도 모르는 거 같아요. 중요한 건 계속 끓고 있다는 거죠. 물론 마감일을 정하고 관리하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있으면 편집자도 있는 것처럼요.”
‘혹시 천재이신가요?’ 무릎을 치며 재빨리 메모했다. 친구는 자기가 친구한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였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아, 진짜 친구 이야기였어요? 본인 이야기인 줄”이라고 말했지만.
- <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이석원, 이다혜, 이랑, 박정민, 김종관, 백세희, 한은형, 임대형 > 중에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작가 백세희의 글이다. 깊이 공감했다. 제목대로 작가들의 쓰고 싶은 상태와 쓰지 않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관한 글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글 쓰는 사람들 마음은 똑같다. 일을 하는 사람도 그렇다.
드라마 미생에서 일하는 장면은 회의를 하거나, 상담을 하거나, 컴퓨터 자판을 똑딱거리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멜로가 체질에서 드라마 작가 임진주(천우희 분)가 글 쓰는(일 하는) 장면은 노트북을 열심히 치는 모습. 물론 글이 안 써져서 괴로워하는 장면도 나오기는 하지만. 일을 하는 상태, 글을 쓰는 상태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그림'은 그렇다. 그런 모습을 보여줘야 시청자는 설득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오상식 차장(이성민 분)이 영업 3 팀원들과 곱창에 소주를 마셔도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옥상에서 담배를 피워도 일을 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임진주가 연애를 해도 글을 쓰는 것이고 손범수 피디(안재홍 분)와 퍼마신 맥주에 푹 절어도 글을 쓰는 상태다.
하루 종일 일에, 글에 집중하면 모든 일상이 소재이고 영감의 원천이니까.
사랑이 딱 그렇다. 사랑에 빠지면 같이 있어도 보고 싶댔나, 24시간 그(녀)만 생각한다. 상대의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경험한다. 사랑받기 위해, 내 사랑을 잘 전하기 위해 초집중 상태가 된다.
남이 보기엔 놀아도, 쉬어도, 한가한 드라이브를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스위치가 항상 켜져 있는 상태다. 일을 잘하고 싶고,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이 글을 쓰면서 올해는 계속 깨어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기차가 정해진 철로를 따라가듯 관성처럼 굴러가던 회사의 낡은 구조를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혼자 바뀌겠다고 결심한다고 금세 되는 일도 아니다. 거래처, 협력사 설득과 동의도 구해야 하는 난도 높은 일이다. 1부터 10까지 재점검하고 개선책을 궁리한다. 타업체의 협조를 끌어낼 아이디어를 짜내고 수선하고 있다. 자나 깨나 일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브런치 진입 초기에 쓴 작가 소개글이 '생각이 업(業)입니다. 블라블라'였다.
글쓰기도 똑같다. 맥락을 잃지 않고 원고지 600매를 쓰는 첫 경험이 나를 쉬지 못하게 한다. 더 잘 쓰기 위해서는 한시도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애만 쓰고 글은 좋아지지 않을 때가 많지만, 그것도 경험이고 알게 모르게 축적이 되리라고 기대한다.
공장 뒤뜰에 한가로이 앉아 노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글 발행이 간헐적이라서 글을 안 쓰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나는 치열했다.
다시 말하지만, 올해의 시간은 참 마디게 흐른다. 잠 못 드는 밤이 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