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말들

쓰기 위해서는 읽어야 하더라

by 수필버거


일은 데스크톱으로 하고 글은 노트북에 쓴다. 항상은 아니지만 95%쯤 그렇다. 회사의 내 방에서 글을 쓰는 경우는 잘 없다. 아주 가끔 쓰기는 해도 글쓰기는 커피숍과 노트북 조합이 최선인 것 같다. 아직 내게 글은 일이 아니므로, 일과 글을 분리해야 하나 보다.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열어도 바로 글을 쓰지는 못한다. 안 한다가 아니라 못한다이다.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몸 상태는 글 쓸 때와는 온도와 압력이 다르다고 느낀다. 뜨거우면 내려야 하고, 차가우면 덥혀야 한다. 압이 낮으면 높이고 고압이면 풀어야 한다.


쓰기 전에 밀리의 서재 앱을 켜고 책을 불러내 읽는 날이 많은데, 앱에 없지만 읽고 싶은 책은 백팩에 넣고 다니기도 한다. 좋은 글을 읽으면 내 글도 좋아질 것 같은 주술적인 믿음이 있다.

'잘 쓴 남의 글을 읽는다-부럽다-쓰고 싶다.'

온도와 압력을 조절하는 과정이다. 읽으면서 서서히 맥이 느려지며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끼는 그 시간이 좋다. 우주선과 잠수함에는 감압실이 있다. 내부와 외부의 압력차가 큰 환경에서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얼마간 압력 조절을 해야 안전하게 들고 날 수 있다. 책을 읽는 몇 분에서 몇십 분의 시간이 감압실 역할을 한다. 유체이탈을 하듯 걱정, 불안, 들뜸, 흥분의 몸에서 서서히 빠져나오며 거리를 두고 그 감정들을 차분히 바라보는 기분이 들 때가 글쓰기 발동이 걸리는 순간이다.

오늘은 하얼빈(김훈 저/ 문학동네)을 읽었다. 글 맞이용으로는 주로 에세이를 보지만, 이 책이 이번 달 독서모임(대책회의) 선정도서고 모임도 얼마 남지 않아 부득불 소설을 집어 들었다. 읽으면서, 덩치는 크지 않으나 깊고 단단한 내면의 힘을 온몸으로 뿜는 정갈한 차림의 사내와 마주 앉은 느낌이 들었다.

신문의 문장은 곧고 단단해서 읽는 사람을 찌르고 들어왔다.
-<하얼빈 / 김훈 저> 중에서


책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담담히 그린다. 내용은 서늘하고 비장하며, 문장은 묵직하고 단호하다. 김훈 작가의 문장은 여전하다. 대리석 같은 그의 문장은 작가들의 작가란 말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한다. 위의 인용문은 마치 작가 자신의 문장을 묘사하는 것 같았다. 슬슬 글이 쓰고 싶어졌다.




내 글은 여물지 못하고 무르다. 아직 고유의 문체가 정립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글을 쓰는 경험과 투자한 시간이 짧아서라고 생각한다. 필력이 짧은 나는 며칠만 글을 쓰지 않아도 쉽게 감을 잃고, 당장 읽고 있는 작가의 영향도 쉽게 받는다. 한마디로 물렁한 상태다. 오늘 글에선 김훈 작가의 영향이 옅게 느껴지리라고 '감히' 짐작한다.


정말 막막하게 글이 안 써질 때는 비상용 약을 먹듯이 은유 작가의 책 ‘쓰기의 말들'을 연다. 생각을 꾹꾹 눌러 짜내서 벼린 그녀의 문장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무겁지 않고 밝은 느낌을 유지하는 은유의 글에는 글쓰기에 관한 작가의 연력도 흠뻑 들어있다. 몇 번을 읽었다. 한 글자도 못쓰고 집에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순간에는 거의 '반드시' 약효가 있다. 당연히 그날 글은 은유 작가의 영향이 비친다.


조금씩 읽어서 오래 본 책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저 / 문학동네)’이다. 김금희 작가의 산문집을 글 맞이 책으로 한 꼭지, 두 꼭지씩 야금야금 읽었다. 이 책의 다섯 번째 챕터를 쓸 무렵이다. 그때 쓴 글들은 자기 노출이 좀 과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일 얘기를 이만큼 섞어 써도 되나 회의가 들 때, 김 작가의 글을 읽으며 용기를 냈다. 자기 노출에 대한 걱정은 대개 부끄럽다거나, 이런 하찮은 개인적인 얘기가 공해가 되지나 않을까 할 때 든다. 김 작가의 글을 읽으며 그런 우려를 어느 정도 덜 수 있었고, 내 글을 쓸 수 있었다. 물론, 문장의 길이 같은 사소한 측면에서 김 작가의 영향이 당시의 글에 스며있겠다.


본 브런치 북을 쓰는 동안 글 맞이용으로 큰 역할을 책을 한 권 더 들자면 ‘혼자여서 좋은 직업 (권남희 저 / 마음산책)’이 있다. 그녀의 글은 경쾌하고 밝다. 에세이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면, 따라 나오는 걱정이 이 글은 일기일까 에세이일까 하는 경계의 모호함에 대한 것이다. 근자에 쓴 글을 다시 읽으면 자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누가 귀한 자기 시간을 들여서 읽을까 싶은 과하게 사적인 글들. 권 작가의 유쾌한 에세이는 그 경계가 좀 느슨해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녀 덕에 시답잖은 내 얘기를 좀 더 자주 꺼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고마운 책이다.


덥히고 식히려고 읽은 책들이 내 손을 잡아 자판을 치게 했다. 읽으며 배우고, 배우며 쓸 수 있었다.

마의 구간 같았던 챕터 5를 이 글로 닫고, 이제 여섯 번째 챕터로 넘어간다.



오늘 글 제목은 은유 작가의 책에서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