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다 조금 빠른, 스페인의 봄
날이 부쩍 따뜻해졌다. 겨울 패딩을 꺼내 입는 날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가디건이나 재킷을 꺼내 입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은 30도 가까이 오르면서 꼭 여름 같은 더위가 느껴졌던 3월. 그렇게 산세바스티안에는 본격적인 봄이 찾아왔고, 꽃이 만발했다.
공원을 가로질러가면 어학원까지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다. 거진 매일 공원을 지나가는 덕분에 조금씩 바뀌어가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스페인 북부의 위치한 산세바스티안은 남부에 비하면 날씨가 쌀쌀하고, 특히 겨울 시즌에는 비바람이 매섭게 치는 날이 많다. 하지만 역시 스페인 도시이기 때문인지, 겨울에도 잔디는 푸른색을 유지한다
그래도 2월이 되면서 풀 곳곳에는 노란 민들레가 봉긋 피어올랐고, 3월이 되니 이름 모를 하얀 꽃과 노란 꽃이 점점 풀 사이의 빈자리를 가득 메웠다. 기분 탓인가, 잔디 풀 색도 좀 더 선명한 초록빛이 된 듯했다
어릴 적 '봄'하면 떠오르는 꽃은 개나리, 진달래였다. 하지만 20대 이후 '봄'하면 먼저 떠오르는 꽃에는 '벚꽃'도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어쩌면 학교 캠퍼스 안에 벚꽃나무가 많아서, 나의 봄 풍경은(비록 그 시즌은 늘 중간고사와 겹쳤지만) 온통 분홍빛이었기 때문에 봄꽃에 벚꽃나무가 자연스레 추가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처럼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스페인에도 곳곳에 벚꽃이 있다. 그리고 산세바스티안에는 마치 우리나라 도시처럼 벚꽃나무가 제법 있었다. 자리를 잡고 피크닉을 할 정도로 벚꽃나무가 많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예쁘게 꽃을 틔운 나무를 보며 나와 그의 봄을 축하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름 모를 가로수 나무에도 하얀 꽃이 피어올랐다. 초록잎으로 도시의 여름 풍경을 더 예쁘게 꾸며주던 이 나무의 모습이 기억난다. 그런데 왜 꽃이 핀 모습은 기억이 없지? ......아, 작년 봄에는 스페인 락다운 때문에 집에만 갇혀있었지. 그렇다. 따지고 보면 산세바스티안의 봄 풍경을 제대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산세바스티안의 봄은 가히 예뻤다. 발렌시아는 11월까지도 해변을 즐길 정도로 연중 날씨가 따뜻한 편이라 봄이 되었다고 해서 '봄이다!'하고 느낌이 팍 오지도 않았고, 풍경의 변화도 별로 없었는데, 여기는 봄 시즌이 되니 날씨가 부쩍 좋아지고 도시가 꽃으로 덮이니 '드디어 봄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길가에, 공원에 자연스럽게 피어난 꽃도 있지만, 도시 조경을 위해 크고 작은 광장에 심어진 꽃들도 있다. '꽃을 심을만한 공간이 있다' 싶은 곳에는 모두 심은 듯 여기저기서 쉽게 이런 꽃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길을 걷다가 봄꽃을 발견할 때면 예쁘다며 핸드폰 카메라에 사진을 담느라, 폰 사진첩이 온통 꽃밭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봄꽃 투어(?)의 하이라이트. 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겹벚꽃 나무를 발견했다. 한국에서도 종종 겹벚꽃나무를 볼 수 있다지만, 나는 아직 두 눈으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겹벚꽃 나무를 실물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상에, 예뻐! 너무 예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한번 핸드폰 카메라를 켜 사진을 담았다. 이미 해가 넘어간 시간이라 사진은 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결국 다음 날 같은 장소로 다시 향해 사진을 담았다
이렇게 꽃 얘기만 하고 끝내기에는 아쉬우니, 산세바스티안 바다 이야기도 조금 해야지. 꽃이 만든 풍경만큼이나 산세바스티안 바다도 유독 아름다웠던 3월. 30도 가까이 올라간 그 날에는 발도 살짝 담가보았다. '흐으으허어어' 역시 계곡물처럼(혹은 그 이상) 차갑다. 한여름에도 계곡물처럼 차갑기 때문에, 지중해 바다를 생각하고 스페인 북부 바다에 몸을 풍덩 던지는 건 위험하다
3월 말부터는 해변에 사람이 엄청 많아졌다. 나는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해변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스페인 해운대 개장'이라고 적어 보냈다. 4월 5일 부활절을 맞아 1-2주간 스페인을 비롯해 유럽 사람들이 휴가를 가지는 휴가철이기 때문에 해변에는 현지인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다. 마스크를 자꾸만 벗어던지는 사람들을 보며 당분간은 해변에 발을 디디지 않기로 했다
봄의 그 야리야리한 초록빛을 넘어 나뭇잎은 이제 여름의 색을 띠려 한다. 이렇게 곧 여름이 올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