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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만소리 Aug 02. 2019

여기는 시험에 합격하려고 오는 곳이 아니예요

무심하게 내려앉은 밤에도 꺼질 줄 모르고 보름달처럼 빛나던 야학의 창문

오늘의 기분

우울함을 치유받는 기분



“이번 여름 방학 때 아르바이트해보지 않을래?”  

   

유독 부지런했던 선배 한 명이 케이블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를 정기적으로 제작하는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고 했다. 인원은 셋 혹은 넷. 당시 한 편당 제작비로 꽤 쏠쏠한 금액을 편성받았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일을 물어온 선배를 주축으로 우리는 몇 편의 다큐멘터리 기획을 짰다. 몸에 예술을 그리는 타투이스트, 집안의 나쁜 공기를 제거해주는 공기청정기,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사람들의 야학이 우리의 기획이었다. 몇 편의 기획이 더 있었는데 오래전 일이라 다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시간은 밤 10시. 나를 포함한 다큐멘터리 스태프들이 촬영을 종료하고 짐을 싸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입김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쌀쌀한 초겨울 밤의 온도였다. 혹여나 빈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올까 싶어 머플러를 목까지 풀어 다시 칭칭 감아야 했다. 뒤따라오질 않는 나를 돌아보던 선배가 무언가 발견하고 정리한 카메라를 다시 꺼냈다. 카메라가 향한 곳은 깜깜하고 무심하게 내려앉은 밤에도 꺼질 줄 모르고 보름달처럼 빛나던 야학당의 창문이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야학당엔 보일러도 없고 불빛도 성치 않았는데. 어쩜 저렇게 환하고 따뜻한 빛을 낼까. 나는 그 순간이 필름처럼 각인되어 잊을 수가 없다.  


    

  4층 건물 맨 꼭대기에 위치한 야학당은 아주 작은 곳이다.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복도가 나온다.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가면 꽉 찰 정도일까. 그곳이 야학당 선생님들의 사무실이다. 어디서 주워온 것 같이 허름한 책상 위엔 학생들을 위한 책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복도 겸 사무실을 지나서 나무로 된 문이 하나 더 있다. 이 문을 열면 늦깎이 학생들의 교실이 나온다. 교실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다. 칠판 하나, 쇠붙이와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책상 여러 개와 의자. 그리고 작은 난로가 야학당의 전부다.


 야학당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이 가장 많다. 간혹 검정고시를 못 본 학생들이 몇몇 함께 공부한다. 70대 어르신들과 10대 아이들이 함께 앉아서 검정고시 공부를 하는 곳이 바로 여기 야학당이다.     




  처음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야학당에 방문했을 때,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을 촬영할 계획이었다. 막상 방문한 야학당은 “방송국 선생님들이 너무 늦었네. 한글은 애저녁에 뗐지, 우린 검정고시 공부하는 학생들이여.”라며 웃는 어르신들이 있었다. 우리는 기획을 수정해서 검정고시를 공부하는 어르신들을 촬영했고, 야학당 선생님들의 인터뷰를 땄다.


 교실은 꽤 추웠다. 야학은 주로 밤에 운영되기 때문에 오늘 같은 초겨울 밤은 연필을 꼭 쥔 손이 제법 시렸다. 그래도 교실은 사각사각 연필로 부지런히 배움의 기쁨이 적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 기쁨의 온도가 창문을 넘어 바깥까지 환하게 비쳤나 보다.     






편집하면서 돌려본 늦깎이 학생들의 인터뷰 중 기억나는 말이 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할아버지가 이런 말을 남겼다.


“졸업장이 필요해서 공부하는 게 아녀. 졸업장 없이도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생기면 뭣하겠어. 그냥 못 배운 게 한이 돼서 그래. 그래서 여기 앉아서 뭔가를 배우는 게 좋아. 배우는 내가 보기 좋아.”     


 옆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말을 더했다.     


“시험에 턱 붙어도 고민이여. 여기 와서 배우는 게 좋은데 붙으면 못 온다니께 참말로 큰일이여. 허허허. 이런 말 하면 우리 선생님께 혼나는데 어쩌겠어. 나는 여기가 좋응께.”     





 배움의 기쁨이 그곳에 있었다.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 더 나은 미래 계획을 위해서 배움을 대했던 우리와 달리 그곳엔 순수한 배움의 기쁨이 있었다. 목적이 아닌 과정이 주는 기쁨. 먼 훗날의 행복이 아닌 숨 쉬듯 뱉어내는 행복. 차가운 초겨울 밤까지 따뜻하게 안아주던 그날 밤의 불빛을 잊을 수 없다. 배움의 기회를 앗아간 가난의 시대를 살 수밖에 없었던 어르신들은 불행을 좌절과 원망이 아닌 배움으로 치유하고 있었다.


어찌 그 날을 잊을 수 있을까.




여행자이자 기록자

김한솔이 (키만소리)

엄마와의 여행을 기록하다 : 출간 완료 <엄마야 배낭 단디 메라>

남편과의 여행을 기록하다: 위클리 매거진 <여보야 배낭 단디 메라>

엄마와의 메일을 기록하다: 출간 예정 <저도 할 수 있을까요?>

세계여행 후 다수의 순간을 기록 중: 세계 여행 전문 서적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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