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받은 자만이 듣는 바위의 속삭임
양양 죽도 해변은 이제 더 이상 조용한 어촌 마을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서핑을 즐기는 이들로 붐비기 시작하더니, 줄지어 들어선 감각적인 카페들과 호텔, 아파트들이 그 자리를 굳혔다.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는 젊은이들에게 이곳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일상 속 쉼표 같은 명소가 되었다.
후니 역시 그중 하나였다. 특별한 의미 없이, 강원도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 잠시 들른 해변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뭔가 달랐다. 봄기운이 완연한 4월의 오후, 파도를 가르는 서퍼들의 모습이 부럽기도, 한편으로는 멀게 느껴졌다.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마음을 잡기 위해 커피 한 잔을 들고 2층 테라스에 앉은 그는 그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죽도섬, 한번 가볼까?”
누군가 툭 던진 말에 이끌리듯 일어섰다. 죽도섬. 해변에서 길 하나 건너면 나오는 작은 섬. 죽도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예전에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있는 섬. 관광지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후니에겐 그저 별 생각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섬에 다가서자, 바람이 달라졌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흩뿌렸다. 그리고 곧이어 눈까지 섞여 내렸다. 4월에 눈이라니. 어안이 벙벙한 채로 죽도섬의 입구에 서니, 그곳엔 무언가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입구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한 마리 고양이였다. 평범한 고양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크고, 무엇보다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눈보라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후니를 응시하던 고양이는 마치 판단을 내리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순간, 눈보라는 더욱 거세졌다.
후니는 자연스럽게 고양이 옆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죽도섬 안쪽은 눈으로 덮여 있었지만, 묘하게 따뜻했다. 소나무들이 고요히 흔들리고 있었고, 그 나무들이 마치 길을 가리키듯 바람결에 움직였다. 말없이 그 흐름을 따라 걷는 후니 앞에 갑자기 은빛 옷을 입은 선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아무런 말 없이 후니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앞서 걷기 시작했다. 마치 후니의 도착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선녀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섬의 깊숙한 바위 지대였다. 거기서 그는 신선을 만났다. 단단한 바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더니, 형상은 조금씩 사람의 모습을 띄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신선은 마치 물결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바위였다. 그 신선은 이렇게 말했다.
“흐르는 자만이 살아있다. 너는 멈췄다. 두려움은 멈추게 만들고, 멈춤은 곧 썩음이다.”
그 말에 후니는 어느새 잊고 지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한때는 도전이 두렵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실패와 반복되는 상처는 그를 움츠리게 했고, 도전은 멈췄다. 그는 살아있었지만, 살아있지 않았다.
두 번째 신선은 붉은 색조를 띈, 불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잿빛으로 가라앉은 온기를 지녔다.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단지, 네가 감췄을 뿐이다. 다시 꺼내라.”
후니는 오래전 청춘을 걸고 준비했던 사업을 떠올렸다. 망했다. 지지부진한 실패를 수습하는 사이, 사람들도 떠났다. 그 뒤로 그는 다시는 꿈을 꿔보지 않았다. 자신이 더는 타오를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선의 말은 그 믿음을 무너뜨렸다.
세 번째 신선은 바람의 형상을 닮은, 가볍고 유려한 곡선의 바위였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조용하지만 멈추지 않는 에너지를 풍겼다.
“고통은 지나가는 바람이다. 너는 지나간 것을 붙잡고 있다. 놓아라.”
그 말에 후니는 가족과의 갈등, 자기혐오, 끝없는 자책을 떠올렸다. 그는 그것들을 마음 한켠에 묶어두고 있었고, 그 무게에 짓눌려 자신을 놓지 못했다. 그러나 그 순간, 조용히 내리던 눈이 그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아니, 떠났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선녀들은 사라졌고 신선의 형상도 다시 바위로 돌아갔다. 대신 바위 뒤편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그 길 끝에 있었던 것은 ‘죽도암’이라 불리는 암자였다.
죽도암 앞에서 후니는 발걸음을 멈췄다. 바위 아래 앉아있는 듯한 형상의 조각이 마치 관음보살 같았다. 그리고 그 형상은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후니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위로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런 미소일 것이다.
그 순간, 눈은 멈췄고 하늘은 다시 맑아졌다. 처음 섬에 들어오기 전 봤던, 따사로운 4월의 봄날.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같은 하늘, 같은 햇빛, 그러나 달라진 건 ‘그’였다.
섬을 나와 다시 해변으로 돌아온 후니는 이전과 같은 풍경을 보았다. 여전히 서퍼들은 파도를 즐기고,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르게 보았다. 그 속에서 흐름을 읽을 수 있었고, 불씨를 다시 느꼈으며, 고통이란 것도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죽도섬은 그런 곳이었다. 세상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잠시 멈춤을 허락하고, 다시 흘러가게 해주는 섬.
그리고 후니는 이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