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의 전환: 자본시장의 변화가 시작됐다
한국 자본시장이 움직이고 있다. 과거에는 기업의 총매출과 영업이익, 자산가치와 같은 숫자가 평가의 전부였지만, 이제는 그보다 앞서 묻는다. 이 기업은 AI 시대에 맞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고령화 사회에 걸맞은 거버넌스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 자본시장의 룰이 바뀌고 있다.
정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상법 및 자본시장법 개정’, ‘배당 확대’, ‘자사주 소각 의무화’, ‘소액주주 권익 강화’, ‘세제 개편’, ‘첨단산업 지원’까지 다각도의 전략이 동시에 작동 중이다. 그 중심엔 금융위원회의 Corporate Value-up 프로그램이 있다. 이제 상장사는 자사주 매입, 배당 정책, 이사회 구조를 포함한 주주가치 환원 계획을 구체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성의 없는 IR은 외국인과 기관투자자들의 선택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정책적 기반 위에, 더 근본적인 구조 변화가 동시에 다가오고 있다. 바로 AI와 고령화, 두 메가트렌드다.
BCG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기업의 98%가 AI를 도입했지만 실질적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은 불과 26%에 그친다. 이들 26% 기업은 영업이익과 총주주수익률(TSR) 모두 시장 평균을 압도한다.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 혁신의 수단이 되었다.
사례는 분명하다. 일본 도요타는 AI를 생산 공정에 접목해 효율을 개선하고, 그 결과 배당성향을 40%까지 끌어올렸다. 대만 TSMC는 AI 기반의 반도체 설계 자동화로 생산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잡았다. 이런 혁신은 투자자들에게 명확한 신호를 보낸다: AI를 잘 활용하는 기업이야말로 지속 성장 가능한 기업이다.
글로벌 연기금과 대형 자산운용사들은 기업의 AI 활용도를 거버넌스 지표로 받아들이고 있다. 단지 ‘AI를 쓴다’는 선언이 아니라, 얼마나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체계를 갖추고, 얼마나 기술을 내재화했는지가 중요하다. 이제 “이 기업은 AI로 효율성과 투명성을 얼마나 확보했는가?”라는 질문이 투자 판단의 핵심이 되었다.
IMF는 205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생산가능 인구 비중이 급격히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국은 이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연금, 보험, 투자자산의 운용을 책임지는 기관투자자들이 안정적 현금흐름에 더 민감해지고 있다.
이들은 배당을 중시한다. 동시에 기업은 신기술에 대한 공격적 투자를 이어가야 한다. 딜레마다. 배당을 늘려야 할까, 아니면 미래 성장을 위한 투자를 늘려야 할까?
KB금융은 그 중간 해답을 제시한 사례다. CET1 비율(자기자본비율) 초과 자본을 주주환원에 쓰되, 동시에 디지털 전환을 위한 IT 투자도 병행한다. 일본 기업들은 고령화 압력을 선제적으로 맞이하며 배당을 높이고, 동시에 로봇·자동화 분야에 지속적으로 투자해 주가가 30년 만에 고점을 경신했다.
고령화는 위험인 동시에 기회다. 자산의 안정성과 성장성 간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기업이야말로, 시장의 신뢰를 얻는다.
전통의 강자 FAANG(Facebook, Apple, Amazon, Netflix, Google)과 달리, MZ세대는 새로운 방향을 선택하고 있다. 팰런티어, 앱러빈, 로빈후드, 코인베이스, 이른바 PARC로 불리는 종목들이 바로 그것이다.
코인베이스: 미국 최대 코인거래소로,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수혜의 중심에 있다. AI 기반 수수료 모델과 이자수익 구조가 강력한 성장 엔진이다.
로빈후드: 수수료 없는 거래, 모바일 중심 서비스, 그리고 프리미엄 구독 모델로 MZ세대를 사로잡았다.
팰런티어: 미국 정부와의 계약, 판타지적인 브랜드, 캐시 우드의 지지로 탄탄한 팬층 확보. 흑자 전환 후 수익성 개선 중이다.
앱러빈: 모바일 게임 개발자와 사용자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MZ세대의 콘텐츠 기반 수익 모델을 지지하고 있다.
FAANG이 배당 중심 안정 주주환원 모델이라면, PARC는 미래 성장 기대 중심 고위험·고보상 모델이다. 이들의 선택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AI 시대의 투자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음을 반증한다.
한국 기업은 지금 중대한 변곡점에 서 있다. 정부는 상법·자본시장법 개정과 함께 배당 확대, 자사주 소각 의무화, 기업 지배구조 투명화, 첨단산업 세제 혜택 등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 중이다. 이는 명백한 기회다.
하지만 구조적 조건만 바뀐다고 기회가 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태도와 방향이다. 단순히 배당을 늘리고, 일회성 IR을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투자자는 AI 활용도, 배당 정책의 신뢰성,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함께 본다.
SK하이닉스의 AI 반도체 투자, KB금융의 안정성과 혁신의 균형, 삼성전자의 명확한 배당정책, 이 모든 사례가 향후 10년간 고성과 기업의 공통 언어가 될 것이다.
자본시장의 패러다임은 이미 변했다. 과거처럼 단기 실적과 일회성 배당만으로는 시장을 이끌 수 없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바뀌었다.
“이 기업은 AI로 얼마나 효율적이며, 고령화 시대의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이행하고 있는가?”
투자자는 미래를 보는 눈으로, 기업은 전략적 비전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주주가치 경영은 숫자가 아닌 방향성의 싸움이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지금이 그 결정적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