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이라는 목적이 사라졌을 때
필자는 상장 전엔 쉬지 않고 움직였다. 기업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갔다. 투자 유치를 위한 명확한 목표—‘상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드쇼, 미팅, 피칭, 세미나, 포럼… 누가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고, 심지어는 우리가 먼저 연락해 자리를 만들었다. 회사를 ‘보여주는 일’이 곧 기업가치와 직결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상장 후 상황은 달라졌다. 공식 의무공시 외엔 IR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제 상장도 했으니' 하는 안일함에 빠졌다. 투자자는 알아서 찾아올 거라 생각했고, 실적만 잘 내면 주가도 따라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시장은 생각보다 냉정했고, 정보의 진공 상태는 개인투자자들의 투기적 움직임만 부추겼다.
우리는 어느새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증권사 리서치도, 언론 언급도, 기관 방문도 없는 ‘투자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었다. 주가는 의외로 민감했다. 조금만 안 좋은 뉴스가 나도 주가는 급락했고, 반대로 아무리 좋은 소식을 내놔도 시장 반응은 냉담했다. 기관투자자는 없었고, 개인투자자의 기대와 불안만이 시장을 요동치게 했다.
문제는 대응할 전략도, 리스크 관리 능력도 부족했다는 것이다. 실적 발표 이후 주가가 하락하면 "왜 그럴까?" 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정작 투자자와의 소통은 없었다. AI 시대에 기술이 빠르게 진보하고, 새로운 사업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우리는 고립된 섬처럼 점점 잊혀져갔다.
우리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외부 IR-PR 대행사를 선정해, 증권사 및 기관투자자 네트워크를 다시 확보하고자 했다. 기관투자자들이 선호하는 포맷으로 기업설명서를 전면 재정비했고, 글로벌 기술 트렌드와 국내 정책 방향을 분석해 ‘스토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앞으로 무엇을 할지, 왜 지금이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대행사를 통해 만난 증권사, 운용사, 자산운용사들과의 1:1 미팅은 예상외로 반응이 좋았다. 처음엔 낯설어하던 기관들도, 질문을 주면 성실히 대응하고, 요청 자료를 맞춤형으로 제공하자 점차 신뢰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3개 이상의 리서치센터에서 기업 분석 리포트를 작성해 배포했고, 주가도 서서히 반등했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변화는 ‘기관이 먼저 IR을 요청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술 중심 기업의 특성상, IR은 낯선 영역이다. 오너도, 실무진도 "성과로 말하지, 굳이 홍보까지 해야 하나"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성과는 말로 풀어주지 않으면 시장에 가닿지 않는다. 숫자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맥락, 전략, 철학, 방향성을 스토리로 바꿔 전달하는 역할이 IR이다.
AI 시대라고 해서 모든 게 자동화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인간적인 해석과 내러티브의 중요성은 커진다. 기관은 단순히 데이터를 보기보다, 그 기업의 리더십, 조직 문화, 시장 이해도, 위험 관리 능력을 IR을 통해 파악한다. 이것이 IR이 여전히 ‘사람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이유다.
AI 기술이 급변하는 시대, 존재하지 않는 기업처럼 시장에 묻혀버리는 것은 치명적이다. PR이든 IR이든 ‘소통’은 결국 존재감을 만드는 기술이다. 단순히 주가 방어를 위한 활동이 아니라, 기업 생존과 확장의 기반이다.
IR은 단기 성과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정당성과 미래의 가능성을 시장에 알리는 하나의 약속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더 적극적으로 기관과 만나고, 언론과 인터뷰하고, 정책 트렌드에 발맞춰 기업의 비전을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느 날 그냥 사라져도 모를 기업이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