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부의 이동을 주도할 것인가?
스테이블코인은 태생적으로 "디지털 달러"의 성격을 지닌 자산이다. 변동성이 큰 비트코인이나 알트코인과 달리 가치가 안정적이고, 언제든 법정화폐로 전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이 안정성은 단순히 투자자 보호 차원을 넘어, 디지털 경제의 기본 유동성으로 기능하게 만들었다.
2025년 현재, 스테이블코인의 총 공급량은 2,300억~2,5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불과 5년 전과 비교하면 5배 이상 성장한 수치다. 이 자산은 더 이상 "암호화폐 시장 안의 조연"이 아니다. 스테이블코인은 국경을 초월한 송금, 무역결제, 자산 보존 수단으로 빠르게 자리 잡으면서, 전통 금융의 중심부를 위협하는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되고 거래되는 주 무대는 이더리움(Ethereum)이다. 2025년 중반 기준, 스테이블코인의 70% 이상이 이더리움 네트워크에서 발행·유통된다. 이더리움의 스테이블코인 공급량만 1,680억 달러에 달하며, 이는 트론의 2배, 솔라나의 14배에 해당한다. 이 흐름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스테이블코인의 확장은 곧 이더리움의 확장이다.
네트워크 수요 증가
스테이블코인은 DeFi(분산금융), NFT, 크로스보더 결제 등에서 핵심 유동성 제공자로 사용된다. 발행량이 현재 대비 20배 증가한다면 거래량은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하고, 모든 거래의 가스 수수료가 ETH로 지불되기 때문에 ETH 수요는 급증할 수밖에 없다. 최근 단기간에 16억 달러($1.6B) 규모의 스테이블코인이 유입되며 이더리움 네트워크 활성화가 이미 가속화되고 있다는 데이터가 이를 뒷받침한다. 더 많은 스테이블코인이 유입될수록 이더리움 블록체인의 트랜잭션 처리량은 늘어나고, 이는 곧 ETH의 본원적 가치와 사용성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직접적인 호재가 된다.
플라이휠 효과
이더리움은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백본(Backbone)’으로 불릴 만큼 높은 안정성과 분산화를 강점으로 가진다. 스테이블코인이 대규모로 발행될수록 이 자금은 자연스럽게 DeFi 프로토콜에 재투자되며, ETH는 가치 저장 수단(SoV)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한다. 더 많은 스테이블코인이 들어오면 → 더 많은 DeFi 유동성이 창출되고 → ETH의 담보 및 수수료 수요가 증가하는 선순환 구조가 지속적으로 확대된다. 이 과정에서 이더리움의 확장 네트워크인 레이어2(Layer2) 솔루션(예: Arbitrum, Optimism) 또한 거래 수요를 흡수하며 함께 성장한다.
이더리움은 이제 단순한 스마트 컨트랙트 플랫폼을 넘어 글로벌 금융 인프라로 재정의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대규모 확산이 예고된 상황에서, ETH는 결제·수수료·담보·가치저장이라는 다층적 기능을 모두 수행하며 비트코인과는 다른 네트워크 기반의 경제적 프리미엄을 확보할 잠재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는 곧 ETH 가격의 중장기적 상승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펀더멘털 중 하나다.
특히, 스테이블코인 기반 자금이 DeFi로 유입되면서, 전통 금융기관이 오랫동안 독점해왔던 예금-대출-투자 구조가 이더리움 생태계에서 구현되고 있다. 이는 곧 "은행 없는 은행"이 실현되고 있다는 뜻이다.
스테이블코인의 성장은 비트코인에 직접적인 네트워크 효과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시장 전체 유동성을 확대시키며 간접적이고 제한적인 긍정 효과를 만든다.
디지털 금의 지위
비트코인은 여전히 ‘디지털 금’이라는 내러티브에 집중하며, 가치 저장(Store of Value)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때문에 스테이블코인과 직접적으로 연동되는 서비스나 거래는 제한적이다.
스테이블코인이 아무리 늘어나더라도 이더리움처럼 트랜잭션 수수료(가스비)로 ETH가 쓰이듯 BTC가 자동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스테이블코인 발행량이 급증했음에도 비트코인 네트워크의 온체인 활동은 비교적 평평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시장 유동성 확대에 따른 간접 지원
다만 스테이블코인 공급 증가가 암호화폐 전체 시장의 유동성을 끌어올리면서, 비트코인 가격에는 간접적인 지지 효과를 제공한다. 스테이블코인은 대부분 BTC와의 거래쌍(페어)로 사용되기 때문에, 거래량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BTC의 매매 활성도가 상승한다. 특히 대형 거래소에서 스테이블코인-비트코인 거래쌍이 늘어나면, 가격 발견 기능이 강화되며 BTC의 글로벌 유통성과 가격 안정성이 개선된다.
BTC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한계
BTC를 기초 자산으로 한 스테이블코인(예: WBTC, sBTC)이 존재하긴 하지만, 전체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 미만에 불과하다. 스테이블코인 공급이 20배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ETH처럼 네트워크 차원의 직접적 수혜(가스비·스마트컨트랙트 사용 증가)는 기대하기 어렵다.
디지털 금으로서의 신뢰 강화
스테이블코인은 대부분 달러에 연동되어 있지만, 달러의 공급과 미국 정책에 의존한다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 규제 불확실성이나 발행사 리스크가 부각될 경우, 궁극적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 비트코인의 탈중앙성과 공급 한정성(21M 한도) 이 다시 조명될 수 있다.
금융 디지털화의 파급 효과
스테이블코인이 글로벌 송금·결제를 혁신하면, 디지털 자산에 대한 제도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 흐름은 자연스럽게 비트코인 ETF, 기관투자 확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논의 등 제도권 편입을 가속화하는 촉매가 될 수 있다. 비록 직접적 네트워크 수익은 제한적이지만, 비트코인의 장기적 시장 규모와 가격 형성에는 긍정적 압력을 줄 가능성이 크다.
이 거대한 흐름을 전통 금융기관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히 블록체인 산업의 성장 동력이 아니라, 부의 이동을 촉발하는 핵심 트리거다.
은행의 시각: 스테이블코인이 예금을 대체한다면, 은행의 본질인 ‘자금조달 기능’은 무너진다. 실제로 젊은 세대와 신흥국 사용자들은 은행 계좌보다 스테이블코인 지갑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은행권의 수익 기반을 잠식한다.
자산운용사의 시각: 스테이블코인은 달러와 직접 연동되는 자산이기에, 채권과 단기 예금에 대한 수요를 대체한다. 이로 인해 자산운용사의 ‘저위험 투자상품’ 수익 모델이 흔들린다.
정부의 시각: 부의 이동은 곧 세수와 통화정책에 직격탄을 준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자국 화폐를 대체하는 순간, 중앙은행은 금리·통화 공급을 통한 거시경제 관리 기능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결국, 정부와 금융기관은 규제라는 방패를 들고 나설 수밖에 없다. 최근 미국 정부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를 은행처럼 규제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전통 금융사들이 이제는 수동적 규제자가 아니라, 능동적 플레이어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은행권: JP모건은 자체 스테이블코인(JPM Coin)을 상업 결제에 활용 중이며, BNY Mellon은 암호화폐 커스터디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일부 은행은 스테이블코인 기반 송금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핀테크 기업: 페이팔은 자체 스테이블코인 PYUSD를 출시했고, 이는 결제 네트워크와 즉각적으로 연결되었다.
라틴아메리카: 브라질의 누뱅크(Nubank)는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과 신용카드를 결합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이는 은행이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한 외부 위협이 아니라, 내부 서비스로 통합하려는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대응은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다. 전통 금융사 입장에서는 ‘부의 유출’을 막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스테이블코인이 확산되면서, 금융권은 은행 설립 이래 처음으로 리딩 플레이어가 될 기회를 맞이했다. 과거에는 항상 새로운 산업을 따라가던 은행이, 이번에는 앞장서서 변화를 주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이는 단순히 암호화폐와 금융의 융합이 아니라, 부의 지도 자체가 다시 그려지는 과정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국경 없는 달러, 탈중앙화된 지급결제, 자산의 토큰화를 동시에 실현시키고 있다. 전통 금융이 이 흐름을 외면하면, 고객의 자산과 신뢰는 디지털 네이티브 기업으로 이동할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이 촉발하는 변화는 더 이상 "가능성"의 영역이 아니다. 이미 남미에서는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가 무너진 나라들에서 스테이블코인이 실질적 법정화폐의 대안으로 쓰이고 있다. 미국, 유럽, 아시아의 은행과 핀테크들은 대응을 넘어 적극적인 실험을 시작했다.
부의 이동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방향은 분명하다. 앞으로의 질문은 단순히 "스테이블코인이 금융을 바꿀까?"가 아니다. 이제는 "누가 이 부의 이동을 주도할 것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