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을 수집하라. 그것이 AI 시대의 진짜 스펙이다
이력서를 다시 쓴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학교 이름, 졸업 연도, 직장 경력—이 세 줄로 압축되던 시대가 있었다. 그 이력서는 "나는 어디에 소속되었는가"를 증명하는 문서였다. 하지만 지금, 그 문서의 유효기간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경험이력서(Experiential CV)라는 개념이 주목받는 시대다. 학벌과 직함이 아닌, 어떤 순간들을 살아왔는가—그것이 그 사람의 진짜 역량을 보여준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AI가 등장하면서 가장 먼저 흔들린 것은 '지식'이었다. 방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분석하고, 요약하는 능력—한때 그것은 인간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그 능력은 몇 초 안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지식을 많이 아는 것, 빠르게 검색하는 것,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차별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경험'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확신은 머릿속 논리가 아니라, 내가 직접 겪어온 수많은 순간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모르는 곳에서 1박을 해야 한다거나, 처음 타보는 차를 타고 낯선 길을 가야 한다거나, 언어도 통하지 않는 거리에서 길을 찾아가야 할 때마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타입이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고, 손끝이 예민해지고, 머릿속 지도가 재빨리 그려진다. 마치 평소에 잠들어 있던 세포들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느낌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 순간이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두려움 때문에 멈추지는 않으려고 애써왔다.
그래서였을까. 강의 요청이 오거나, 설명회 제안이 들어오면 나는 일단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편이다. 준비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 말부터 꺼내놓고 나면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다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말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잠을 줄이고 책을 찾아 읽고, 슬라이드를 새로 만들고,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경험과 생각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꿰어 맞추는 과정이 뒤따른다. 매번 다짐한다. “다음에는 준비가 더 되면 수락하자.” 그런데도 비슷한 요청이 올 때면 또다시 "해보겠다"고 말하는 나를 발견한다. 때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 이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구나.
이런 패턴은 여행에서만, 강의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IT 전공자가 아니었던 내가 처음 책을 쓰게 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현장에서 마주치는 IT 용어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도망치듯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단 안으로 걸어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이해되지 않는 용어들을 내 말로 다시 풀기 시작했다. 회의실에서 쓰이는 난해한 표현들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 보았다. 그렇게 적어 내려간 메모를 쌓다 보니,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이해 안 되는 사람이 분명 더 많을 텐데, 이게 누군가에게는 필요하겠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The Callcenter Book』이다. IT 비전공자를 위해 용어를 정리하고, 기술이 아니라 업무 프로세스의 흐름 속에서 IT를 설명해 보려 했다. 나에게는 생존을 위해 만든 개인 노트였지만, 누군가에게는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후에도 현장에서 부딪히며 남겨둔 메모들은 『페이스북 페이지 만들기』『핀테크』『베트남비즈니스2030』등과 같은 책들로 이어졌다. 낯선 분야에 들어가 허우적대던 내 경험이,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다른 사람의 길을 밝히는 작은 등불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AI 시대에 이런 경험들이 왜 중요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AI는 이미 “잘 아는 것”에서는 우리를 압도한다. 지식을 정리하고, 사례를 찾아주고, 논리를 구성하는 일은 AI가 우리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해낸다. 하지만 AI는 한 가지를 할 수 없다. 낯선 환경 속에서 숨이 가빠오는 그 느낌, ‘겁나지만 그래도 해보겠다’고 마음먹는 그 찰나, 그리고 말해 버린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버둥거리며 밤을 새우는 그 과정을 직접 살아낼 수는 없다.
AI는 "낯선 환경은 성장을 가져온다"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낯선 도시의 새벽 공기, 처음 서 보는 강단 위에서 손이 떨리던 순간, 이해되지 않는 개념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다가 비로소 ‘아, 이거였구나’ 하고 오는 깨달음의 온도는 모른다. 그 온도, 그 체감의 층위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말에는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같은 내용을 이야기해도, 한쪽은 머리로만 알고 말하고, 다른 한쪽은 몸으로 겪은 것을 꺼내 놓는다. 듣는 사람은 그 차이를 직감적으로 느낀다.
돌아보면 내 삶은 ‘낯선 것 앞에서 일단 예스라고 말하는 연습’의 연속이었다. 실은 겁이 많아서, 그래서 더 먼저 나서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때그때는 늘 벅찼고, 때로는 후회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설명해 주는 가장 솔직한 문장이 되었다.
AI가 더 똑똑해질수록, 우리는 어쩌면 더 자주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이 경험은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도전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인가?” 그 질문에 답하는 재료는 검색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뛰어들어 버린 순간들에서 나온다.
나는 여전히 낯선 길이 두렵다. 앞으로도 모르는 도시의 밤, 처음 서 보는 무대, 전혀 다른 언어로 진행되는 회의 앞에서 심장이 빨리 뛰는 경험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제는 안다. 그 두려움을 감수하고 한 걸음 내디딘 순간들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나만의 진짜 스펙이 되어주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