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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할 결심

by 민주

집이 생겼다는 명목으로 결혼을 하게 됐다. 울며 겨자 먹기였나? 그건 아니었다. 실은 나는 결혼을 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결혼이라기보다는 가정을 갖고 싶었다. 단란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가족.


내게는 두 세계가 있었다. 하나는 십대 시절, 이래라 저래라 하는 대로 줄 지어 나아가야만 했던 세계. 그 세계에 속하려면 나는 꽃다운 나이, 이십대 후반에는 진즉 결혼을 했어야 했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여성은 팔리기 어려우니까. 다행히 나는 그 세계로부터 뛰쳐나왔고, 이십대 시절 그 꽃을 꺾어 불태웠다. 학내 교지실을 드나들며 구호를 쓰고 촛불을 들었다. 활-활-.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 제도는 족쇄로 비유됐는데, 결혼 제도도 그 중 하나였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오래된 구호에 반발을 들 동지들은 없었다. 점차 나는 내 인생에서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지워버렸다.


그럼에도 내 꿈에는 어른어른, 성냥불에 부쳐진 찰나의 불꽃처럼 따뜻한 가정에 대한 모습이 일렁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어떤 생각이 튀어나와 그 불을 후-하고 꺼뜨린다. '나만 그렇게 행복해도 될까?'라는 생각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종종 다른 이들의 슬픔이나 고통이 투과되어 온 몸을 스쳐 지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특히나 행복에 젖어 있을 때, 전쟁과 폭력의 현장, 고아와 굶어 죽는 사람들, 탐욕스러운 인간과 마약에 찌든 사람들이 튀어나와 마구 괴롭다. ‘이것이 현실인데... 나 혼자 행복해도 되나?’하며 작아진다.


그리고 나면? 나는 이 세계도 저 세계도 아닌... 어중간한 곳에 서 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온다. 이 곳은 주로 출력한 기사 글이 책상을 덮은 교지실이나 연구실로 부르던 단골 카페다. 여기서 하는 일은 비슷하다. 널부러진 사회 문제의 파편 중에서 하나를 집어 올려 ‘그것이 어디서 왔을꼬....’ 하며 동지들과 머리를 맞대고 뿌리까지 파고드는 것이다. 열띤 토론을 하며 머리에 불을 지피는 행위는, 알 수 없는 거대한 슬픔을 잊을 수 있는 나만의 해결책이었다. 반대하고,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


결혼도 그 중 하나였다. 인생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그건 (특히 여성에게) 명백히 손해 보는 장사였고, 나의 두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어떤 책 어떤 귀퉁이에서는 (결혼) 제도에 탑승하는 것은 제도 바깥의 소수를 더욱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읽은 것 같다. ... 에잇! 그런 것에 에너지를 허비하지 말자, 세상엔 해야 할 좋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세상 바깥에서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일했다. 나의 몫을 찾으려고, 알 수 없는 슬픔을 잊으려고.


그리고 지금, 결혼의 기회가 찾아와버렸다. 그렇다. 툭 튀어나온 ‘기회’라는 말이 나의 풋내 나는 진심을 대변해주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것과 마주앉았다.


너 정말 괜찮겠어?
뭐가?
행복할 거냐는 말이야.
나? 지금 행복해~
이대로 살아도 쭉 행복할 거란 말이지?
흠... 응! 할 일도 있고, 주변에 좋은 친구들도 있고, 만족해!
불안하진 않겠어?
뭐가?
승일이와 지금처럼 각자 열심히 할 일 하면서 동거만 하는 거. 가면 가는 거고, 오면 오는 거고. 연애만 하면서.
좋지? 음...


그 순간 아주 어렸을 적 수채화로 그린 그림이 머리 위에 떠올랐다. 알록달록한 꿈으로만 가득 색칠된 8절지 도화지에는 웃고 있는 가족이 있다. 그림 속 세계는 해결해야 할 문제 투성이인 세상과는 달리, 넓고 깊고 밝았다. 그림을 통과하여 세상으로 나올 수는 없을까? 종이의 끝을 잡고 이어보려는 데 저 쪽에서 어떤 아우성이 들린다.


그런 사사로운 일에!

결국 너도 똑같네.

하지만... 이것도 나야!


나만 아는 ‘그림 속 나’와 사람들이 아는 ‘세상 속 나’. 그 ‘나’들을 이어주어야 온전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온전해져야만, 또렷하거나 흐릿한 여러 종류의 슬픔에도 두 눈을 뜨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이 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손에 쥔 카드를 슥슥- 펼쳐본다.

반대, 거부, 저항 ...

이번에는 그 아래의 카드까지 넘겨볼 용의가 생겼다. 스윽-슥.

해체, 변형, 창조...

창조라... 재미있겠는데?


그 날 밤 짝꿍에게 말했다.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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