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삼 년 가까이 나와 대학원에서 동문수학했던 선생님을 만났다. 동기지만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으시고 교장직에서 은퇴하신 후, 비문해자들의 한글교육과 검정고시 준비를 돕는 야학 기관을 지금까지 운영하고 계신다. 적은 예산을 지원받아 무료로 운영을 하시니 야학의 살림이 넉넉하지를 못한 현실이라 마음 쓰이던 차, 나는 혹 봉사하시는 강사님들이 사정상 강의를 못할 경우 대타 강사로 몇 차례 도움을 드렸었다.
졸업 후, 정식 강사가 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무료 봉사로 도움을 드리겠다는 나의 약속은 바쁜 일정으로 지켜드리지 못했다. 늘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났다며 전화를 주셔서 학교 근처 카페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를 ''정선생''이라며 늘 존대해 주시던 그분이 헤어질 때, 가방에서 읽어보라고 주신 책이 '아큐정전'으로 유명한 중국의 루쉰이 쓴 산문집 <아침 꽃 저녁에 줍다>라는 책이다.
제목부터가 관심을 끄는 이 책은 루쉰이 쓴 회고록으로 루쉰의 풍자적인 문체가 잘 드러나 있으며, 소소한 삶의 일상 속에서 하는 사유와 철학이 잔잔한 목소리로 들어있다. 그래서인지 한편 한편 읽기에 부담이 없다.
<조화석습>이라는 아름다운 사자성어가 된 <아침 꽃, 저녁에 줍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루쉰은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은 아침 꽃을 꺾어 꽂으면 그 향기와 색깔은 훨씬 좋을 터이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누구나 아름다운 꽃을 원한다. 꺾어서 그 빛깔과 향기의 절정을 만끽하고 싶어 가장 싱싱하고 아름다울 때 우리는 화병에 꽃을 꽂는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라는 말은 아침, 저녁이라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꽃을 '줍는다'는 것에 의미를 더 둔 것이다.
꽃은 피어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시간의 한계가 있다. 화병 속 꺾여서 꽂힌 꽃이든, 온전히 꺾이지 않은 채 화단에 있는 꽃이든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말라 버린다. 시들고 말라서 떨어진 꽃을 줍는다는 것은 꽃을 온전히 그 생명이 다할 때까지 바라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든 꽃이 있다면 뽑아 버리지 않고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울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해 본다. 그리고 길가나 화단의 예쁜 꽃이라면 꺾어서 화병에 꽂아두지는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우리가 자연 속에 꽃을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조화석습은 여러 면에서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식을 바라볼 때 중간에 간섭하지 않고 부모 뜻대로 조정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끝까지 자신의 꿈을 펼치는 것을 지켜보는 것.
또 나를 지켜보는 것.
황혼의 나,
나이 들어가는 것을 슬퍼하거나 예전 같지 않음에 실망, 좌절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늙어가는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 정말 힘든 일이겠지만 사유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