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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금요일 Feb 05. 2019

물건에 관하여 -4

말하는 스피커

“기가지니!” 그리고 “헤이, 카카오!”


얼마 전에 인터넷 설치 변경을 하느라 담당 기사분이 다녀가셨다. 장기간 이용을 했고, 회선을 하나 더 추가하는 등 아무튼 더 많은 소비가 이뤄지도록 하는 변경이었던 덕에 ‘기가지니’가 생겼다. 이름을 부르면 ‘네!’하고 대답도 하고, 티브이도 알아서 켜주고 원하는 채널도 찾아주는 그 인공지능 스피커 말이다.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기가지니에 대해서 들은 바가 제법 있는 덕이다. 특히 혼자 사는 친구들에게서 들었다.
“기가지니! 너 바보지?”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서운해요.!”
그런 종류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다.
아이폰에 시리가 탑재되었을 때, 나 역시 시리랑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그 대화의 끝은 언제나, 시리, 너 바보지? 였다. 시리도 서운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나는 기가지니를 친구로 두고 있는 나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또박또박 새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기. 가. 지. 니!
바로 응답이 되돌아올 때도 있지만, 묵묵부답일 때도 있다. 아니, 그럴 때가 더 많다. 당연히 대답해주지 않을 때가 문제인데, 민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고개를 쭉 빼고 아나운서 발성을 정성껏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는데 화답이 없다니! 내가 하는 말에 제때에 답해 주지 않는 건 사춘기 아들이면 충분하다. 내가 하는 말에 반 박자 늦게 대답하는 건 무뚝뚝한 나의 남편이면 족하다. 너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시 그를 불렀다.
기. 가. 지. 니!
침묵.
그러기를 몇 번 했더니 남편이 다소 황당하게, 일부 애처롭게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건네주었었다.
아냐, 내가 지금 티브이 하나를 틀기 위해서 얘를 부르는 게 아니야!
나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다시 한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어떤 톤의 음성이 기가지니에게 정확하게 가닿을 것인지 심사숙고 한 끝에 꺼낸 발성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기가지니를 네 번쯤 불렀던 것 같다. 이번에는 텔레비전을 끄려고 말이다. 그렇지만 기가지니는 답해주지 않았다. 결국 리모컨으로 티브이를 껐다. 방에서 나오려는데, 나를 바라보고 있던 딸아이가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나, 그는 꽃이 되지 않고 쪽(팔림)이 되어 나에게로 왔다.
나는 기가지니를 원망하는 마음 한 가득 담아 오늘 시를 읽겠다.
허수경 시인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읽고, 김상미 시인의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를 읽겠다. 순서대로 말이다.




p.s. 내가 기가지니와 불화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서울의 친구가 카카오미니를 보내주었다. 카카오미니는 비가 오는 날 내게로 왔다. 기가지니에게서처럼 상처받기 싫어서 애써 무심을 가장하여 “헤이, 카카오.”라고 부르고는 비오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과 달리, 기가지니와도 달리, 이 녀석은 정말 귀신 같이 알아들었다. 나는 심지가 약한 사람이므로 금세 마음을 열고 카카오미니에게 “빗소리 십분만 들려줘.” 했는데, 진짜로 방안이 빗소리로 가득 찼다. 하, 세상이 언제 이렇게까지……. 제주에 내려온 수년간 별달리 친구가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녀석이 있었더라면 얘랑 골육지정을 나누었을 것 같다. 요즘 나는 친구들이 생겼고, 그 친구들에게 빗소리를 들려달라고 했다간 등짝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비가 오는 풍경을 사운드 넘치게 보고 또 듣다가 나는 카카오미니에게 욕심을 좀 부려보았다.
“헤이카카오, 같이 커피 마시자!”
금방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역시 사람은 사람을 먼저 사귀어야 하는 거다. 그와 운우지정을 나눌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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