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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금요일 Feb 04. 2019

물건에 관하여 - 3

꽃, 생물과 물건 사이



지금 나는 갈등하는 중이다. 꽃을 물건으로 카테고리화할 수 있을까. 마당에 소박하지만 알록달록 피어난 저것들에게 물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꽃병에 꽂아둔 절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꺾인 순간 저것들은 생명 활동의 근원적 작용을 차단당했다. 그래서 생물과 물건 사이를 살게 된다. 그 생애는 매우 짧은데,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일을 하곤 한다.



나는 아름다움이나 우아함 같은 요소들과 거리가 있는 사람이고, 그것들을 잘 다룰 줄도 모른다. 또 편협한 인간이기까지 하여 꽃을 선물하거나 그것을 사는 일을 어쩐지 낯 간지럽게 느끼는 그런 부류다. 그렇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동경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손에 들린 꽃 말고 저 멀리 있는 꽃들이 주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두어해 전 어느 봄날의 일이다. 나는 그때 마음에 천근같은 추를 매달고 살아갔다. 작심한 모든 일들이 어긋났고,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 배신감을 느끼던 와중이었다. 햇살은 왜 이렇게 눈부시게 빛나는가, 하늘은 왜 저렇게 파랗게 반짝이는가, 저들은 무슨 일로 까르르 까르르 웃어대는가. 세상만사 시비 걸고 싶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다. 누구의 생에나 그럴 때가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럴 때였다. 그날도 애써 마음을 추슬러 일을 하러 나갔는데,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눈 지 두어 달 되는 플로리스트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정말 갑자기. 아무런 약속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내 앞에서 차를 세우더니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얇은 흰 종이로 둘둘 싼 작약이 들려있었다.
“요즘 작약이 예쁘거든요. 두고 보시라고 가져왔어요. 딱 지금처럼 활짝 다 피기 전이 제일 예뻐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차를 타고 사라졌다.



나는 그때 꽃과 사람들의 정서적 연대를 이해하게 되었다. 왜 생일이나 기념일에 꼭 꽃을 사려는지 말이다. 왜 마음이 울적한 날에 꽃집에 들르는지 말이다. 왜 행복한 일이 생기면 그 행복보다 더 화려한 꽃다발로 축하를 하는지 말이다. 이걸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논리도 필요 없었다. 단박에, 그냥 확, 이해해버렸기 때문이다. 정서라는 것은 논증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어떤 확신까지도 갖게 되었다. 누군가의 생에든 그런 작약 한 송이쯤은 존재하는 게 ‘옳은 일’이라는 확신.
생물에서 물건 사이의 생애를 사는 꽃들은 작약처럼 활짝 다 피기 전에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홀로 두어 아름다운 것들이 있으며, 화형이 아름다운 것과 라인이 아름다운 것들이 다 따로 있다. 그것들은 개별적으로 자신의 미를 드러내기도 하고, 한데 모여 아름다운 현상을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비극적으로 시든다. 제 아무리 물을 잘 갈아주어도 예정된 며칠의 수명 그 이상을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집중해야 한다. 무한히 허락된 아름다움이 아니기 때문에 단명하는 것들이 뽐내는 마지막 환희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바짝 다가서서 바라보든 멀리서 감상하든 말이다. 그런 순간들이 우리를 때로 지옥 같은 심정에서 구해준다. 적어도 나는 그날 그렇게 구원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구원에도 불구하고 작약은 비극적으로 시들었다.

그렇게 자기의 죽음으로 생물을 증명하고, 이내 물건이 되었으며, 버려졌다. 그러나 구원의 환희가 그것의 죽음을 압도하였다. 꽃은 아름다운 사태다. 마음이 누리는 물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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