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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k Glove May 08. 2021

게으름뱅이 직장인 미국대학원에 가다

(3) Library

 써내야할 레포트가 두개에 다담주 학기말 과제까지 있는데, 금요일 출장과 금요일까지 긴급하게 처리한 업무로 내 체력과 함께 지능도 방전 된 것 같은 토요일 아침, 나는 학교 도서관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점심으로 라면을 간단히 끓여먹고, 전공책 한권 분량의 프린트 물과 노트북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손 소독제와 마스크도 잊지 않고 넣는다. 도서관 내 무료 스터디 룸을 예약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오픈 공간에 책상들이 크고 좋으니 그냥 가기로 한다. 도서관은 마치 피트니스센터 같다. 다녀오고나선 참 좋은데 거기 가기까지 마음먹고 행동에 옮기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나는 undergraduate 대학을 다니면서도 도서관을 즐겨 찾았다. 도서관 카페에서 휘핑크림 잔뜩 올라간 달달한 커피 마시고, 비싸고 맛없는 차가운 샌드위치를 사먹고, 도서관에서 오가는 친구들을 만나고 노닥거리는 것이 좋아서. 한국 대학의 도서관은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드라마에서 보면 모든 공간에서 정숙해야 되는 것 같다. 미국 대학은 대부분은 '떠들어도 되는 공간/그룹 프로젝트를 하거나 과외를 받을 수 있는' 과 '절대 정숙' 해야하는 공간이 나뉘어있다. 떠들어도 되는 공간에서는 정말 소리를 지르거나 음악을 크게 듣지 않는 이상 크게 제재를 받지 않는다. 나와 몇몇의 고정친구들은 거의 매일 비슷한 위치의 책상에서 공강 시간마다, 시험기간 마다 만나서 놀았다. 쓰면서 생각해보니 정작 책은 잔디 밭에 누워 읽고 공부는 자취방에서 했었다. 결국 도서관은 마음편한 놀이터 였다. 어쨌든 책은 펴 놓고 있었으니. 돈도 많이 안들고 인터넷 빵빵하고. 어느정도로 도서관에 자주갔는가 하면, 바에서 술을 마시고도 습관적으로 도서관을 향했을 정도다. 그냥 그렇게 마음이 편했다. 그 공간에서.


지금 다니는 대학의 도서관은 두번째 방문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도서관을 걸어들어갔다. 역시 대학 캠퍼스 답게 잔디가 푸르고 어린 학생들이 프리즈비를 던지는, 곳곳에서 대학생 특유의 풋풋한 싱그러움과 에너지가 느껴진다. 도서관 1층의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들어갔다. 하루키의 말처럼 뇌에 찬물 샤워를 하는 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의 책상에 자리 잡았다.

워드 파일을 열고, 수도꼭지를 꽉 잠근 듯이, 2페이지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던 단어들을 손바닥으로 얼음 녹이듯 한글자 한글자 천천히 생각해 낸다. 머리에 쥐가 난다. 회사에서의 보고서는 윗분들이 보시기에 편하도록 요점만 정리해서 간략하게 만든다. 학교에서의 레포트는 최대한 려서 상세하게, 기술적으로 작성해야하기에 (아는 지식을 뽐내며), 직장에서 10년여를 작성해 온 보고서 스킬이 대학원 보고서에 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라는 것을 절절하게 느끼며 레포트 장 수 채우느라 온갖 요행을 피웠다. APA 양식으로 커버 채우기, 글자 크기 12로 늘리기, 장 수가 제일 많이 나오는 폰트 찾기 등등. 내가 직장인으로서 도움이 되는 것은 데이타 레퍼런스 자료를 유료사이트에서 고민없이 결재하는 정도.자료찾는 1시간을 아낄 수 있다면 30달러 정도야.

시간은 결과와 상관없이 너무도 잘 흘러 4시 반이 되었고 주말이면 5시에 도서관을 닫는다. 겨우겨우 레포트 하나는 끝냈고 다듬을 시간도 없이 다음 과목 레포트는 이제 첫 두줄을 적었다. 대학생이었을 적에는 이런 상황이 큰 스트레스 였을텐데 10년간의 직장생활은 이런 상황 정도야 웃으며 넘길 수 있게 만든다. 동료들과 점심 먹으며 대학원 과제 밀려서 해치우느라 똥줄 탔다고 얘깃거리 삼을 수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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