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ily ever after...?
여름에 돌아왔는데 다시 그 혹독한 여름이 왔다가 가고 있다. 적응하느라 바빴다고 하기엔 적응이랄 게 있었나 갸우뚱하고, 그냥 8년을 몰랐던 한국을 단시간에 채워 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던 우리의 목표는 차근차근 채워지고 있고, 초반엔 삐걱거리기도 했지만 현재는 남편과 나도 그럭저럭 안정된 날들을 보내고 있다. 한국 오면 사람들과의 관계의 홍수 속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우리도 이젠 나이가 들어 경험치가 쌓여서인지 속 시끄러울 일이 별로 없다. 괜한 걱정이었다.
어린이는 일 년 동안 할 줄 아는 게 꽤 많아졌다. 수영은 접영을 빼고 나머지 영법을 꽤 잘하게 되었고, 태권도는 초록띠까지 땄다. 태권도가 채워줄 줄 알았던 생활체육에 대한 목마름은 리듬체조가 채워줘서 줄넘기, 훌라후프, 리본, 공, 브리지, 물구나무, 옆돌기 등 다양한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 작년엔 뮤지컬을 반년 동안 준비하여 무대에 올리는 경험을 해 보았다. 피아노는 체르니 100을 격파 중이며 중간에 콩쿠르에 나가 준대상을 받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첼로도 배우기 시작하여 얼마 전엔 [나비야]를 연주했다. 만들기 공방에 다니다가 회화 중심의 미술학원에서 배우고 있는데 그림이 제법 그림다워지더니 어쩌다 미술대회 본선에 진출하게 되어 이번 주말에 대회장에 그림 그리러 간다. 요즘은 인라인을 배워 속도 내는 즐거움을 습득하고 있고, 다음 달부턴 K-pop 댄스를 드디어 시작한다. 아이가 앞으로 얼마나 재미있는 것들을 익히게 될지 나도 기대된다.
아이의 영어는 예상했던 대로 여전히 물음표 상태다. 영어만 생각한다면 미국에 1년 정도는 더 있다가 돌아와야 했을까 생각도 든다. 미국에서 받은 마지막 성적표에 G3 정도 수준이라고 했었는데 집에서 화상영어 하는 걸 들어보거나 영어책과 신문을 읽는 걸 보면 여전히 그즈음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괜찮다는 영어학원에 가보기도 했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괴리가 있어서 지금은 집에서 챙겨주고 있다. 영어실력을 올리라고 압박하고 싶지는 않고 잊어버리지만 말자는 마음이다.
미국에서는 아이 따라 학교 왔다 갔다 걸어가는 걸로 겨우 나의 근육에게 체면치레를 했었다. 한국에 와서는 걷기와 함께 주 2회 요가를 한다. 내 몸에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한결 편하다. 건강검진에서도 다행히 크게 나빠진 건 없다고 한다. 남편은 살을 빼고 건강해지겠다며 주 3회 수영을 하고 주 1회 필라테스 개인레슨을 받는데 외형상 변화는 없다. 한국에 먹을 게 좀 많아야지.
20% 팁 부담 없는 한국에서 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와 솥밥을 만 원쯤 내고 자주 사 먹는다. 이만 오천 원짜리 한정식은 진수성찬이다. 이천 오백 원짜리 아이스라테도 충분히 맛있고, 미국에서 못 찾은 맛난 파스타는 한국에 다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아무 때나 슬리퍼 신고 걸어가서(가끔은 버스) 먹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우리, 돌아갈 수 있을까?
가끔 미국이 그립지 않냐고 누군가 묻는다. 애석하게도 그리운 감정은 별로 없다. 그냥 자주 갔던 홀푸즈마켓과 트레이더조가 가끔 생각난다. 아이와 남편은 두고 온 우리 집이 그립다는데 내게 미국집은 렌트를 주고 있어 신경 써야 하는 것 중 하나일 뿐이다. 차다 너무 차. 그래도 미국에 돌아가게 된다면 우리가 살았던 시애틀 언저리로 가고 싶긴 하다. 그 정도의 그리움은 남았다.
이 짧은 단어가 주는 무게가 얼마나 큰지 안다. 정리할 것도 새로 시작할 것도 너무 많고, 예측하고 준비해도 놓치고 어그러지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그래도 막상 해보면 못 할 것도 아니고 일단 돌아오니 차근차근 정리도 된다. 이민자 생활에 너무 지칠 때 내 나라에 돌아와 얻은 힘으로 또 다른 미래를 그려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의 10년을 또 고민한다.
잘했다 역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