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그린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이더니 아니나 다를까 요란한 천둥소리를 내면서 세찬 빗줄기가 쏟아졌다. 그 통에 난리가 난 것은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내린 비로 사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비를 피하기에 바빴다. 사람들이 비를 피하는 방법도 여러가지다. 신문지로 머리를 덮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손바닥으로 비를 가리는 사람, 편의점으로 뛰어가 파라솔 안으로 몸을 숨기는 사람, 어떤 사람은 사과상자를 접어서 머리 위래 얹고 비를 피했다. 어떤 아저씨 한 분은 비 맞는 것도 아량곳 없이 그냥 비를 맞으면서 걸어갔다. 아마도 기왕지사 맞은 비 뭐 어떨까 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아마 난 너를 좋아하나 봐"라는 노랫말 가사가 떠올랐다. 자기를 사랑하니까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 연애할 때 그런 것 있잖아. 자기는 우산을 조금 쓰고 그에게 우산을 많이 쓰게 한 것 말이다. 나중에 보면 한쪽 어깻죽지부터 팔까지 흠뻑 젖었던 기억 말이다. 그런데 아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우산을 따로 쓰고 다니는 우리. 비가 오면 우산을 두 개 들고는 하나 건네주는 게 언제부턴지 모른다. 비 오는 날 '별 것' 가지고 마음이 쓰인다.
어디선가 "철벅! 철벅!" 소리를 내면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비를 손으로 가리며 나란히 뛰어오고 있었다. 편의점으로 들어와 비를 피할 법도 한데, 그냥 뛰어갔다. 얼굴이 비에 흠뻑 젖었다. 옷도 다 젖고, 그런데 뭐가 좋은지 웃고 있다. '어머, 세상에...' 놀란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녀였다. 놀라움에는 부러움이 감추어져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나도 저들처럼 비를 맞으면서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뛰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살다 보면 정말 나도 모르게 우울해질 때가 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 그냥 앞이 캄캄한 그런 상태. 누가 말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내 통제를 벗어난 상태처럼 보인다. 대부분은 이유가 없다. 찾아낼 수 없는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나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는다.
누군가가 손을 내민다. 사람이 손을 내민다는 것은 아주 귀한 행위다. 자기를 믿어달라는 것이다. 이제는 그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모르는 척, 무심한 척,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다. 왜 그러냐고 묻지 않으면 더 좋다. 그는 아마도 내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무슨 말에 상처를 받는지, 무슨 말에 슬픈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내 말을 조용히 들어준다.
상황이 바뀌는 것을 행복이라고 한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반대가 되면 행복을 느낀다. 행복은 먼 곳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을 열면 바로 앞에 있고, 듣고 싶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다. 행복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행복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갖는 것, 그건 상대방에 대한 불편함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 상대방을 희생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변한 건 환경이 아니라 생각이다. "그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런 말을 할 때가 있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누군가는 미안함 마음에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너무 핀잔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사람도 필시 사정이 있을터, 그러니 그냥 대충 넘어가는 넉넉함도 필요하다. 괜히 아름다움에 먹칠할 필요는 없다. 트집 잡고 물어봤자 답도 없다. 누구 탓일까 하는 고민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고민이 깊어지면 밤에 잠을 못 이루지만, 고민하지 않으면 아침에 아름다운 신부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는 당신이다. 당신은 조금 전에 당신을 위해 우산 씌웠다. 비를 맞히지 않게 하려고 허겁지겁 뛰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런 당신이 참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우산을 받은 당신은 참 행복하다.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산을 받고 행복해하는 당신 모습을. 당신은 아무 말 없이 걸어갔지만 그는 나에게 윙크를 했다. 세상에 이런 행복도 없다는 표정으로.
진한 색상으로 칠하지 않아도 된다. 삶의 색상이 분명하지 않아도 된다. 조금 얼룩이 진 것처럼 보여도 괜찮다. 물을 너무 많이 섞어 희미한 색상이어도 괜찮다. 캔버스 속살이 다 보일 정도로 투명한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내가 부끄럽지 않다면 나는 행복하다는 증거다. 다른 사람 말 듣고 그림에 계속 덧칠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당신은 비 오는 날에도 수채화를 그릴줄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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