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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의 숲 Oct 14. 2017

<15> 대만 국제 여성 영화제

Women Make Waves Film Festival: 누구의 도시인가

주말의 타이중, 정확히 말하면 타이중 기차역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긴 거리는 다른 나라로 바뀐다. 인도네시아, 네팔 등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말의 늦은 아침을 해결하고 있다. 거리에는 온통 그들 뿐이다. 식당의 간판도, 음식의 메뉴 이름도, 들리는 언어도 중국어가 아니다. 순간 대만에 있는 것인지,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에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나 역시 외국인, 이방인으로서 이 도시를 여행하고 있으면서 그들이 이 도시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마주하는 건 어딘가 불편하다. 나 역시 타이페이에서 이방인으로서 생활하고 있으면서 중국어를 쓰지 않는 이들이 이곳에 있는 건 어색하다.

대만 국제 여성 영화제, 이름도 참 예쁜 Women Make Waves Film Festival은 올해로 24살을 맞이하는 영화제 계의 고참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다! 이 영화제에서는 단순 페미니즘과 여성 관련 작품 뿐 아니라 다양한 주제의 여성 감독 작품을 상영한다. 그 중에서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이누이트의 분노>였다. 캐나다 여성 감독이 작업한 다큐멘터리로, 원제는 <Angry Inuk>, 중국어로는 《伊努克的怒吼》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영화는 그린피스와 같은 환경 단체들이 멸종위기동물도 아닌 물개의 귀여운 이미지를 이용해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고, 물개 사냥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로 규정하는 것이 이누이트 공동체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누이트 족은 물개를 사냥하여 먹고, 옷을 입고, 가죽을 판매하여 생계를 이어간다. 그들에게 물개 사냥은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라기보다 몇 백년에 걸쳐 해온 생존 방식일 뿐이다. 도시의 현대인들이 커피를 마시고, 스테이크를 써는 것처럼. 또 그들은 지속가능한 생활을 위해 물개를 보호하기도 한다.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들의 삶을 함께 영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누이트 족에 대한 이해없이 미디어와 환경단체는 물개 가죽 판매 금지 법안을 EU에 건의했고, 이누이트 족 공동체는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그들의 생활 구역은 캐나다 내 가장 높은 자살율을 기록하고, 이누이트 족 아이들 10명 중 8명은 끼니를 거른다. 여성 감독은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이누이트 족이 이에 맞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원래 존재하던 사람들을 <원주민>이라고 규정하고 원래 존재하던 생활방식을 <전통>으로 규정하는 것. 그들의 살갗과 민낯을 마주하고 그들의 터전을 직접 방문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법안을 발휘하고,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원주민. 이민자. 난민. 외국인 노동자. 영주권 소지자.

전통. 야만. 도시. 현대.

근대의 용어는 인류 공동체가 오랜 기간동안 일구어 온 모든 것을 송두리 째 바꾼다. 우리는 우리를 대표하는 용어에 의해 정의되고, 제한받고, 파괴당하며 때로는 소멸한다.

대만에도 원주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남아있다. 중국에서 한족들이 건너 오기 전, 서양제국이 섬 포모사를 발견하기 전, 일제가 이 곳을 지배하기 훨씬 이전부터 살아온 사람들. 이제 타이중 기차역 앞은 한족보다 외국인 노동자를 더 찾기 쉽지만 한족은 원주민으로 불리지 않는다.

이누이트의 북극은 누구의 것 일까. 오랫동안 그래왔듯 이누이트의 것일까.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미네랄과 천연자원이 풍부한 캐나다 정부의 행정 구역일까. 잔인한 물개 사냥이 무차별하게 지속되는, EU가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곳일까.

타이중은 누구의 것 일까. 타이페이는? 서울은?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는, 세계화가 매분 매초 진행되고 있는 시대의 이방인에게는 참 무거운 영화였다. 동시에 의미있는 영화였고.

다시 한 번 이 영화제를 찾게 되면 좋겠다. 그 때는 지금의 나보다 덜 무력하고, 답을 알고 있는 나였으면 좋겠다.


무거운 마음을 간간히 달래준 고마운 코코밀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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