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2박 3일 부산 여행을 떠났다. 빈둥대며 게으르게 쉬면서 책 몇 권을 보겠단 생각으로 황현산의 「밤은 선생이다」를 챙겨갔다.
한겨레신문이나 국민일보에 실었던 여러 칼럼을 엮은 책이고, 대부분의 칼럼은 3페이지 내 분량이다. 단숨에 읽어내려갈 수 있는 분량인데 그러질 못했다. 낑낑대며 책을 3권이나 가져갔는데, 이 한 권만 겨우 다 읽고 돌아왔다. 어느 문장과 어느 문장이 마음에 박혀, 이게 뭔지 잠시 멈춰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럴 때면 책장을 덮고 바닷가로 산책을 나섰다. 파도소리와 바닷바람 속에서 걷고 나면, 체한 마음이 소화되는 것 같았다. 분명 부끄럽고 마음 무거워지는 문장들인데, 어쩐지 위로받은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p.12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난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과거도 착취당한다 (2010)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억하는 일. 바로 거기서부터 현재의 시간이 두터워지는 게 아닐까.
p.33
그러나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 아파트들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진은영 시인, 「용산 멜랑콜리아」) 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 (2009)
하지만 나는 부끄럽게도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다 용산역을 지나치면서도, 그 일을 떠올리지 못했다. 이렇게나 나의 현재는 얄팍한 것이었다.
용산뿐만이 아니다. 그 후로도 세월호에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어이없이 죽어갔다. 지금 우리는 부끄러워하고 있는 걸까,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 다행으로만 여기는 걸까. 날카롭고 단정한 이 글을 읽으니, 마음 한구석이 시려와 잠시 책장을 덮었다.
p.42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의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눈앞의 삶을 깊이 있게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김연아가 대학생이 되려면(2010)
바닷가 산책길을 한참 걷다가 다시 들어와 책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 문장을 보며, '현재를 살자'라고 다짐했다.
p.54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가슴속에 있는 시를 우리가 두려워하기 때문일까. 내 아내만 하더라도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상영관을 찾기 어렵고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라고 하지만, 실은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이 무거워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 유례없는 경쟁 사회에서 우리는 조금씩 지쳐 있다. 그렇더라도 마음이 무거워져야 할 때 그 무거운 마음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도 우리의 의무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듯이, 나라 잃은 백성이 독립운동하듯이.
마음이 무거워져야 할 의무(2010)
나 역시 영화 「시」를 아직 보지 않았다. 관심 목록을 열어보면, 마음이 무거워질까 봐 보지 않은 영화가 잔뜩 쌓여있다. 머리로는 당장 내일부터 하나씩 대면하자고 생각하지만, 손가락은 가벼운 액션 히어로 영화를 익숙하게 찾아갈지도 모르겠다.
p.115
우리는 너무나 많은 폭력 속에 살고 있고,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 한다. 긴급한 이유도 없이 강의 물줄기를 바꿔 시멘트를 처바르고, 수수만년 세월이 만든 바닷가의 아름다운 바위를 한 시절의 이득을 위해 깨부수는 것이 폭력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고속도로를 160킬로의 속도로 달리는 것도 폭력이고, 복잡한 거리에서 꼬리물기를 하는 것도 폭력이다.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1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이나, 그 일에 항의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폭력에 대한 관심(2012)
마음이 무거워져야 할 때 충분히 무겁지 못했던 나는, 이 대목에서 또다시 부끄러워졌다.
한 가지 더. 33페이지에서 갑자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을 언급할 때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1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을 짚어낼 때, 어쩜 이렇게 분노를 냉철하게 표현해내는지 감탄스럽다. 이런 문장은 대체 어떻게 써내는 걸까.
p.155
"가끔은 무자극적인 사고를 하는 시간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어느 교수가 그렇게 말했다.
외부의 자극은 최소한으로만 받는 상태에서 자기 생각에 몰두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는 그 말을 그렇게 이해했다. (중략) 일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닌 시간과 공간에서 지지부진하게 힘을 소비하는 일은 많아도 자신을 풀어놓는 데는 늘 실패하는 사람이 자신을 반성하는 일에 서툴 수밖에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내가 자극 없는 사고를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혐오한다기보다는 차라리 겁내고 힘겨워한다고 말하는 편이 아마 옳을 것이다.
찌푸린 얼굴들
자극 없는 사고를 겁내고 힘겨워하는 마음은, 마음이 무거워질 것을 두려워해 영화를 보지 않는 마음과 동일하다. 역시나 일상을 돌아보니, 이도 저도 아닌 시공간투성이다. 잠시 쉬어가야 할 것 같아, 책장을 다시 덮었다. 스마트폰은 무음 모드로 두고, 산책을 나섰다.
일상을 지내다 보면, 자신을 풀어놓는 일은 금세 잊히고 낯선 것이 된다. 이번 연휴가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계속해서 의식하고 연습해야지. 그래서 일정 시간만큼은 꼭 온갖 자극에서 나를 격리하고 쉬게 해줘야지.
p.174
저자는 당신이 잘 아는 것, 사소한 것, 당신의 실패와 변화에 대해 쓰라고 말한다. 사소한 것과 우리가 잘 아는 것은 사실 같은 것이다. 일상에 묻혀 살아온 사람이 거창한 지식을 갖기는 어렵다. 까다롭고 복잡한 이론체계에 친숙해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확보하고 있는 지식이 반드시 적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 주부가 여성주의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자기 친정이 어떻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구별하여 키웠는지는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중략)
우리의 실패와 변화도 이 사소한 것들과 세상의 거창한 이론들이 맺게 되는 관계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실패한다. 우리가 배웠던 것, 세상의 큰 목소리들이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들과 우리의 사소한 경험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고 엇나갈 때 우리는 실패한다. 우리들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저 큰 목소리들 앞에서는 항상 '당신의 사정'이다. (중략) 그런데 우리는 그 실패의 순간마다 변화한다. 사람들마다 하나씩 안고 있는 이 사소한 당신의 사정들이 실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 바로 그 변화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 같은 큰 목소리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지만,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사정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사소한 사정(2002)
p.212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겠다.
먹는 정성 만드는 정성(2003)
귀가 얇은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내 사소한 일상을 계속해서 글로 써야겠다고, 그러기 위해 하찮은 구석구석까지도 정성스레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p.244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기계 뒤에도 사람이 있고 기계 속에도 사람이 있다. 내가 버린 쓰레기도 사람이 치워야 하고 내가 만들어내는 소음도 사람의 귀가 들어야 한다. 골짜기에 댐을 막으면 사람의 집이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개펄에 둑을 쌓으면 그만큼 사람의 생명이 흙속에 묻힌다. 사람은 큰 집에서도 살고 작은 집에서도 살고 집이 아닌 것 같은 집에서도 산다.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2004)
고 노회찬 의원이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을 때 왜 이 책을 김정숙 여사에게 선물했는지 알겠다. 과거를 잊지 말고, 부끄러움을 알며, 마음 무거워지는 게 두려워 비겁해져선 안 된다는 마음 울림을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꼭 한 문장만 전달해야 한다면, 바로 이것일 테다.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결코 잊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가만히 소리 내 읽어봤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한 대목 더.
p.247
선생의 기준은 엄격하고 잘못을 바루는 데는 한 치의 용서도 없다. 일어식 어투인 '있으시기 바랍니다'나 '에 다름 아니다'같은 서술에 붉은 줄을 긋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바탕' '선물' '위치'처럼 자체에 움직임이 없는 명사에 '하다'를 붙여서 말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양호 교사가 크게 부족하다'도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로 고쳐 써야 한다. (중략)
그러나 내 글을 알게 모르게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내가 '꽃이 피었는가 묻는다'를 버리고 '꽃이 피었는지 묻는다'로 쓰게 된 것은 오로지 선생의 덕분이다. '그대로'나 '모두' 같은 말에 가능한 한 격조사를 붙이지 않으려 하는 것도, '나의, 너의'보다 '내, 네'를 쓰려 하는 것도 모두 선생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상징주의에서부터 초현실주의까지'라든지 '여행에의 초대' 같은 말을 쓰고 나서 꺼림칙한 느낌이 남는 것도 선생이 있기 때문이다.
말에 관한 한 나는 현실주의자지만, 선생의 순결주의 같은 든든한 의지처가 있어야 현실주의도 용을 쓴다.
이수열 선생(2005)
나 역시 지극한 현실주의자지만 같은 말이라도 알고 쓰는 것과 모르고 쓰는 것은 천지차이니까, 이 글은 적어두고 이따금씩 되새겨야겠다. 본지 오래돼 가물가물한 「문장강화」도 다시 읽으려 꺼내뒀다. 글은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는 걸까.